쉬프의 '오마카세 리사이틀'
3월 15일 예술의전당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리사이틀>
‘도미솔 시도레도, 라 솔도 솔 파미파미~’
어릴 적에 바이엘, 체르니 교본 좀 뚱땅거려본 사람치고 이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어도 이 선율만큼은 흥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K.545. 천진난만한 멜로디에 샵이나 플랫 없이 악보 깔끔한 C장조다. 전공 트랙과 상관없는 어린이들도 웬만하면 이 곡을 친다. 하지만 악보에 지정된 음표들을 그저 친다는 것과, 악보에 담긴 ‘음악’을 연주해 내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K.545는 모차르트가 어릴 때 쓴 곡이 아니다. 18개의 피아노 소나타 중 16번으로, 그가 32살 되던 1788년에 썼다. 천재의 성숙기 음악이 오롯이 담긴 작품인 것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세상을 떴다.)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정규 프로그램을 마친 안드라스 쉬프가 앙코르 중의 하나로 이 소나타의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객석에선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입이 귀에 걸릴 만큼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선곡이었다. 그런데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연주가 진행될수록 나의 얼굴은 굳어갔다.
충격과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 어린 시절의 나는 피아노에게, 모차르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이 곡은 이토록 우아하고 예쁘게, 아기천사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노(老)신선처럼 깊고 품격있게 연주되어야 하는 건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을 다수 갖고 있고 프로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이 곡을 들은 적도 여러 번이지만, 눈앞에서 듣는 쉬프의 K.545는 마치 처음 만나는 음악처럼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지어 쉬프의 과거 내한 리사이틀에서 같은 곡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대가의 연주는 하수의 연주와 뭐가 다르냐’고 묻길래 ‘도레미파솔만 쳐도 다르다’고 답했던 적이 있는데, 쉬프 연주가 그랬다. 무협지를 보면, 절대 고수는 검을 단순히 긋는 동작만으로도 천변만화를 일으키며 주변을 압도하지 않던가. K.545를 연주하는 무대 위 쉬프의 모습이 마치 무협지의 삽화처럼 보였다.
앞선 2부에선 슈베르트의 길지 않은 작품 7곡을 연주했다. 3개의 피아노 소품집(Klavierstücke) D.946, 즉흥곡 3번(Impromptu, Op. 90 No. 3 in G-flat Major. D. 899), 악흥의 순간 3번 (6 Moments musicaux, Op. 94 No. 3 in F minor, D. 780) 등이 2부 메뉴에 올랐다. 따뜻한 목소리와 조곤조곤한 말투로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쉬프는 슈베르트의 소품들에 담긴 내성적인 노래와 정서를 아름답게 풀어냈다.
연주회를 찾은 지인들 거의 모두가 ‘2부와 앙코르가 1부보다 훨씬 좋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다소 뜬금없지만, 돌아가신 폴리니 생각이 났다. 쇠약해진 말년에 너무 부담 가는 작품들 말고 이런 레퍼토리들로 연주회를 했다면 마지막까지 좀 더 좋은 모습을 남기고 가셨을 텐데… 쉬프의 연주가 안겨준 희열의 한편으로 새삼 아쉬운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 더 중증환자인 직장 동료는 ‘3년째 같은 거’라며 ‘솔직히 1부에선 좀 화가 나더라 ㅋㅋ’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싶어 맞장구를 치다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요리 장인의 오마카세 레스토랑도 사실 그렇잖은가. ‘시그니처’로 꼽히는 대표 메뉴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대신 계절에 맞춰 새로운 메뉴가 추가된다. ‘안드라스 쉬프 오마카세’ 2026년 3월 판에선 슈베르트 소품들과 쇼팽 앙코르 등이 계절 신메뉴였던 셈이다.
다찌(카운터 석)에 앉은 손님과 적절한 대화를 나눠가며 음식 내는 템포를 조절하는 오마카세 셰프처럼, 쉬프도 각 작품을 연주하기 전에 마이크를 들고 간단한 설명을 했다.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을 소개하면서는 ‘바흐는 사실 이탈리아에 가 본 적이 없다’, 이어지는 모차르트 론도를 소개할 때는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가 봤다’고 재치 있게 디테일을 챙겼다. 과거 내한 때 템페스트 소나타를 칠 때는 화성과 페달링에 대해, 또는 3악장의 속도에 대해 이런저런 음악적 설명을 해 주었는데, 이번엔 그러지는 않았다.
이번엔 과거 내한 때와 달리 통역 없이 본인이 영어로만 해설을 진행했다. 내용 전달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전체 공연의 흐름과 시간 소요로 보면 이편이 나았다. 전반부가 1시간 반 (좀 길었다), 대신 후반부가 짧았고,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해 3시간에 맞춰 공연이 종료되었다. 5시에 시작해 8시에 끝났으니 저녁 식사 시간을 감안해도 그편이 좋았다. 통역이 있었으면 적어도 30분 이상 더 길어졌을 것이고, 어쩌면 연주가 한 두 곡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참, 이번 예술의전당 오마카세에서 ‘셰프 쉬프’는 이전 두 차례의 내한 공연 때와 다른 ‘식재료’를 썼다. 예전엔 두 번 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이번엔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를 쓴 것이다.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투어에 썼던 그 파브리니였다고 한다. 짐머만도 ‘오마카세 식’ 리사이틀을 했는데, 짐머만은 말로 하는 설명 없이 피아노만 쳤다. 두 거장의 파브리니 소리가 어떻게 달랐는지,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