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철학하는 올라프손, 누군가에게는 인내심의 80분
[리뷰] 비킹구르 올라프손 리사이틀
3월 24일 美 카네기홀 공연
바흐·베토벤·슈베르트 'E' 음 연주
인터미션 없이 한 곡처럼 이어져
촘촘한 설계 반면 작곡가 고유 색채 희석돼
3월 24일 美 카네기홀 공연
바흐·베토벤·슈베르트 'E' 음 연주
인터미션 없이 한 곡처럼 이어져
촘촘한 설계 반면 작곡가 고유 색채 희석돼
조성진의 서정적 완벽함과 임윤찬의 화산 같은 열정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비킹구르 올라프손은 마치 북극해의 차갑고 투명한 얼음 조각 같은 이질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특히 유럽과 북미 시장은 이미 그를 '클래식의 미래를 설계하는 건축가'로 평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라프손을 가리키며 단순히 피아노 연주자를 뛰어넘어 소리로 철학을 기술하는 저술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한 팬덤을 가진 몇몇 스타 피아니스트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은 클래식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열기가 슈퍼스타 연주자들에게만 집중될수록 또 다른 위대한 예술적 성취는 가려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올라프손 같은 전혀 새로운 결의 피아니스트는 청중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던진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지난 3월 24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리사이틀을 기대와 의문을 함께 안은 채 찾았다. 예정된 시작 시간을 12분 넘겨, 초록빛 벨벳 상의를 입은 올라프손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공연은 인터미션 없이, 작품 사이의 간격도 두지 않은 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다섯 곡을 마치 한 작품처럼 엮어낸 셈이다. 바흐의 프렐류드 ‘E장조’를 시작으로, 베토벤 소나타 Op. 90 ‘E단조’, 바흐의 파르티타 6번 ‘E단조’, 슈베르트 소나타 ‘E단조’,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 Op. 109 ‘E장조’까지 약 80분이 한 호흡으로 진행되었다.
올라프손 본인이 직접 쓴 프로그램 노트에는, E(미) 음을 초록색으로 느낀다고 적혀있었다. 그런 점에서 연주복부터 레퍼토리까지 ‘초록의 향연’이었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실연으로 만난 올라프손의 연주를 한 단어로 쓴다면 '청명함'이다. 투명함이 시각적 이미지에 국한된다면, 청명함은 물리적인 감각까지 포함한다. 온도와 습도까지 느껴진다고 한다면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바흐 파르티타 6번은 정교함이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흠 잡기 어려운 연주였다. 실제로 그는 2023~24시즌 내내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만 90회의 투어를 가졌고,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로워졌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 파르티타 전후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을 배치했다. 각 곡마다의 균형감은 치밀하게 맞물려 있었고,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80분을 이어간 집중력 또한 인상적이었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그의 역량은 연주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동시에 몇 가지 의문도 이어졌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굳이’였다. 연주가 진행되는 1시간 20분 동안 각 곡이 지닌 고유한 결을 ‘E’라는 조성적 틀에 묶은 것이 과연 음악적 다양성을 확장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제한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바흐의 정교함도, 베토벤의 포효도, 슈베르트의 방랑도 모두 올라프손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초록색으로 수렴되었다.
만약 이처럼 하나의 조성과 색채로 모든 곡을 묶어내는 설계가 아니었다면, 각각의 곡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졌을까. 조금 더 자유로운 호흡 속에서 서로를 밀쳐내고 부딪히며 각자의 시간으로 존재했다면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인터미션도, 박수도 없이 80분 동안 비슷한 컬러의 연주가 이어지는 이 구조는 청중들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공연이 시작된 지 40분쯤 지나자, 무대 앞쪽에 앉아있던 한 중년 관객을 시작으로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설계된 이 건축적 구조물이 누군가에는 인내의 공간이 될 수 있고, 보편적 관객들이 소통하기에 피로감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이번 무대는 2025년 11월에 발매된 그의 음반 ‘OPUS 109’를 카네기홀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그대로 옮긴 공연이다. 디지털 매체 속에서 트랙과 트랙 사이의 무음(silence)은 연주자가 설계한 완벽한 의도대로 작동하지만, 살아있는 청중과 호흡하는 실연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주자가 설정한 ‘초록의 유기성’을 지키기 위해 곡과 곡 사이의 최소한의 여백까지 제거한 선택은, 역설적으로 각 작품이 가진 고유의 시간의 흐름을 희석시켰다. 베토벤 소나타 Op. 109, 2악장의 폭풍 같은 에너지는 앞선 바흐의 정교한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절제되었고, 슈베르트의 방랑 역시 베토벤의 지성적 설계에 가로막혀버린 인상을 남겼다. 촘촘한 그물망 안에서 작곡가들의 야성 대신 올라프손이라는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졌다.
보스턴에서 그의 리사이틀을 찾았던 한 피아니스트 역시 비슷한 인상을 전했다. 그의 아이디어 자체는 인상적이었지만, 같은 조성으로 묶고 곡 사이의 호흡을 제거한 구성은 실제 공연에서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는 평가였다. 그 결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보다 올라프손의 존재감이 비대해졌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아이러니하게도 ‘초록의 향연’에서 벗어난 세 곡의 앙코르에서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졌다. 줄리어드 시절 공부했던 두 분의 스승들이 이 연주를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다며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가 비로소 엄격한 통제에서 빠져나오며 연주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와, 이어진 라모의 작품들에서 그의 청명한 피아니즘이 가장 자연스럽게 빛났다.
특정 연주자들에게 집중된 음악 시장에 올라프손이 던지는 이질적 자극은 또 하나의 도전이다. 그는 음악으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음악을 듣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묻는다. 이 질문 앞에 어떻게 답할지는 결국 듣는 사람의 몫이다.
사진. © Fadi Kheir/카네기홀 제공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
[프로그램 및 앙코르 정보]
- 바흐 프렐류드 9번, E장조, BWV 854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E단조, Op. 90
- 바흐 파르티타 6번, E단조, BWV 830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E단조, D. 566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E장조, Op. 109
- 바흐 'G선상의 아리아' 3번 D장조, BWV 1068 (비킹구르 올라프손 편곡)
-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E단조 'Le rappel des oiseaux(새들의 지저귐)'
- 라모 오페라 '보레아스의 후예' 중 'The Arts and the Hours(예술과 시간)' (비킹구르 올라프손 편곡)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한 팬덤을 가진 몇몇 스타 피아니스트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은 클래식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열기가 슈퍼스타 연주자들에게만 집중될수록 또 다른 위대한 예술적 성취는 가려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올라프손 같은 전혀 새로운 결의 피아니스트는 청중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던진다.
올라프손 본인이 직접 쓴 프로그램 노트에는, E(미) 음을 초록색으로 느낀다고 적혀있었다. 그런 점에서 연주복부터 레퍼토리까지 ‘초록의 향연’이었다.
만약 이처럼 하나의 조성과 색채로 모든 곡을 묶어내는 설계가 아니었다면, 각각의 곡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졌을까. 조금 더 자유로운 호흡 속에서 서로를 밀쳐내고 부딪히며 각자의 시간으로 존재했다면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인터미션도, 박수도 없이 80분 동안 비슷한 컬러의 연주가 이어지는 이 구조는 청중들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공연이 시작된 지 40분쯤 지나자, 무대 앞쪽에 앉아있던 한 중년 관객을 시작으로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설계된 이 건축적 구조물이 누군가에는 인내의 공간이 될 수 있고, 보편적 관객들이 소통하기에 피로감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보스턴에서 그의 리사이틀을 찾았던 한 피아니스트 역시 비슷한 인상을 전했다. 그의 아이디어 자체는 인상적이었지만, 같은 조성으로 묶고 곡 사이의 호흡을 제거한 구성은 실제 공연에서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는 평가였다. 그 결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보다 올라프손의 존재감이 비대해졌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특정 연주자들에게 집중된 음악 시장에 올라프손이 던지는 이질적 자극은 또 하나의 도전이다. 그는 음악으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음악을 듣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묻는다. 이 질문 앞에 어떻게 답할지는 결국 듣는 사람의 몫이다.
[프로그램 및 앙코르 정보]
- 바흐 프렐류드 9번, E장조, BWV 854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E단조, Op. 90
- 바흐 파르티타 6번, E단조, BWV 830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E단조, D. 566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E장조, Op. 109
- 바흐 'G선상의 아리아' 3번 D장조, BWV 1068 (비킹구르 올라프손 편곡)
-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E단조 'Le rappel des oiseaux(새들의 지저귐)'
- 라모 오페라 '보레아스의 후예' 중 'The Arts and the Hours(예술과 시간)' (비킹구르 올라프손 편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