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아지가 크게 아팠다. 아홉 살이면 개의 나이로 어엿한 중년에 접어든 만큼, 반려동물을 떠나보냈다는 주변의 이야기가 평소 남 일 같지 않게 들려오곤 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강아지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마주하니 그 상실감과 두려움은 막연히 짐작해 왔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조금만 삐끗해도 빠져버릴 것 같은 깊고 커다란 구멍이 발밑을 내내 따라다니는 기분 속에서 며칠을 제정신이 아닌 채 보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휘청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아무 일 없는 듯, 할 일들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혼자 울다가 남편의 전화에 들킨 순간 외에는 강아지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이 일이나 내 감정 상태를 누구에게도 털어놓거나 의지하지 못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그토록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을까? 아마 평소 내가 쉽게 동요하고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내심 못미더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멘탈’, ‘쿠크다스’, ‘개복치’ 등 예민하고 연약한 심리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는 표현들이 꾸준히 쓰여온 것을 보면 흔들림 없는 강한 정신은 보편적으로도 반드시 갖춰야 할 미덕처럼 추앙받는다. 그러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솔직하게 꺼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세계적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이 “우리의 정신적·사회적 삶의 풍경을 형성한다(『감정의 격동』, 새물결)”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건과 상황 앞에도 동요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면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아볼 내면의 중요한 신호를 놓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진 출처. Unsplash나를 오해하지 않게 하는 ‘감정’이라는 신호
우리가 동경하는 평정심이나 통제력이 자칫 괴로움에 반응하는 레이더를 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소설 『인생』, 『허삼관 매혈기』 등으로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중국의 작가 위화는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느끼게 하는 자신의 일화를 나눈다. 작가가 되기 전 당국에서 직업을 배정받아 치과의사로 일한 그는 예방주사를 놓는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당시 물자 부족으로 주삿바늘과 주사기를 재사용해야 했는데, 첫 근무지에서 노동자들에게 주사를 놔준 다음 날, 유치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예방주사를 놓던 그는 유치원이 울음바다가 된 덕분에 문제를 알아차렸다. 재사용한 바늘 끝이 구부러져 있어서 주사기를 뺄 때마다 살점이 뜯겼던 것이다.
작가 위화. / 사진 출처. Lex - Danmarks Nationalleksikon/필자 제공
아이들의 울부짖음은 전날 노동자들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던 통증을 비로소 인식하게 했다.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게 만든 신호가 된 것이다. 이후 위화는 주삿바늘을 숫돌에 뾰족하게 가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만약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꼈음에도 그것을 밖으로 터뜨리는 능력이 사라진 세상이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구부러진 바늘을 찌르면서도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기이한 평화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어딘가엔 더 거대하고 집단적인 비극들이 가득한데, 고작 내 감정에만 충실해도 되는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사소한 개인의 슬픔에 침잠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지려는 찰나, 위화의 또 다른 말을 붙잡아 본다. 그는 ‘정말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세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고 단언한다. 개인의 내면은 그가 속한 민족, 시대의 배경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사적인 고통을 정직하게 응시할 때 세상과 타인의 비극에도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들 또한 시대적 배경을 세세히 분석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깊숙이 비추는 것만으로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의 파고를 알아차리게 한다.
하지만 나의 내면에 솔직해지겠다는 명목으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가감 없이 쏟아내며 살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자기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거나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종종 생각보다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예술을 곁에 두는 게 아닐까. 예술은 형체 없는 괴로움과 절망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을 표현하는 무수한 갈래의 길이 있음을 펼쳐 보이니까 말이다. 위화는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정직하게 자기를 이해하고, 이를 거창하게 포장하는 대신 호소력 있게 음악 속에 머물게 한 예술가로 차이콥스키를 꼽는다.
제가 차이콥스키를 말러보다 선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초월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꼭 초월해야만 합니까?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이 가득합니다. -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푸른숲)
심연을 선율로 만든 작곡가, 차이콥스키
발레, 교향곡, 협주곡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들을 남긴 차이콥스키는 예민한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유독 과민한 신경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타고난 섬세함에 더불어 생애 내내 이어진 현실과의 불화가 그를 신경과민 상태로 몰아넣었을 것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당시 질병으로 치부되던 그의 동성애적 기질은 벗어날 수 없는 내적 갈등의 씨앗이었다. 사회적 명성을 지키기 위해 도피하듯 선택한 결혼마저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그의 삶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가중됐다.
차이콥스키. / 사진 출처. itoldya420/필자 제공
교향곡 제4번은 그가 겪은 생애 최악의 비극들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예술적 교감이라곤 전혀 불가능했던 안토니나와의 끔찍한 결혼 생활, 그리고 짧은 별거 후 겪은 자살 시도 등 몰아치는 불행의 한가운데서 쓰인 작품이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두고 제자에게 “하나의 마디라도 내가 진정으로 느낀 것을 나타내고 있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내 마음의 숨겨진 심연을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없다(『차이코프스키』, 음악세계)”고 설명한 바 있다.
곡의 서주에서 강하게 터져 나오는 금관악기의 포효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의 급박한 경적처럼 울려 퍼진다. 차이콥스키는 이 소리를 두고 ‘머리 위에 언제나 드리워져 끊임없이 독을 붓는 운명적인 힘’이라고 설명했다. 평화로운 일상과 내면의 정적을 깨뜨리는 듯한 이 모티브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때로는 집요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맴돈다. 차이콥스키는 이 절대적인 운명의 소음 앞에서 절규하고 흐느끼지만, 그만큼 그의 곡에서는 기쁨과 환희 또한 더욱 찬란하다.
주체하지 못할 것처럼 흘러넘치는 감정은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이 비평가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차이콥스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선율적으로 치닫는 대신 형식적 전개력을 향상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을 통해 “슬픔을 나누거나 혼란에 빠져 고뇌하는 감정을 부끄러움 없이 고백(『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포노)”하고자 했다. 오페라 <오네긴>, 교향곡 4·5·6번 같은 걸작들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내면에 가장 깊이 충실했을 때 탄생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4번.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
평정심 이전에 솔직한 마음부터
감정에 대한 통제력과 평정이 미덕처럼 추앙되는 시대일수록,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누군가를 목격하는 일은 모종의 해방감을 안긴다. 삶에는 때때로 평온을 깨뜨리며 불쑥 들이닥치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소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마사 누스바움의 말을 빌리자면 애초에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평정과 강한 멘탈을 좇는 대신,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화해함으로써 진짜 평정심에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정을 직면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제4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건네는 제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서 환희를 찾지 못했다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차이콥스키는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믿었던 게 아닐까. ‘나만의 고통’을 넘어 ‘우리의 슬픔’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이콥스키는 서둘러 울음을 달래기보다 함께 엉엉 울어주며 우리를 바깥으로 이끌어주는 음악들을 남겼다. 우리에게 더 간절한 것은 흔들림 없는 인간보다 서로 휘청일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이해와 공감이다. 인간의 절망과 혼란을 숨기지 않는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은 괴로운 현실과 행복한 꿈과의 교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도피처는 없습니다. 인생의 파도는 우리들을 주무른 후 삼켜버립니다.” - 음악지우사 엮음, 음악세계 편집부 옮김, 『차이코프스키』 (음악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