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신임 한은 총재가 갖춰야 할 조건
정치 압력에 흔들리는 Fed
공감 얻지 못하는 워시 지명자의
두 가지 금리인하 가설
50년 전 '번스의 실패' 재연되나
통화정책 신뢰는 결국 사람 문제
권력 그늘에 기대면 안돼
강태수 KAIST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경제연구원 특임연구위원
공감 얻지 못하는 워시 지명자의
두 가지 금리인하 가설
50년 전 '번스의 실패' 재연되나
통화정책 신뢰는 결국 사람 문제
권력 그늘에 기대면 안돼
강태수 KAIST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경제연구원 특임연구위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새 연준의장에 케빈 워시를 지명했다. 워시 지명자도 금리 인하 숙제를 떠안고 있다. 미국 국가부채가 38조달러를 넘어섰다. 이자 비용만 매년 1조달러를 웃돈다. ‘11월 중간선거’가 코앞이다. 트럼프가 연 3.75%인 기준금리를 연 1% 수준까지 낮추라고 밀어붙이는 이유다.
워시 지명자는 금리 인하가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내세운 논거는 ‘인공지능(AI) 생산성 가설’과 ‘Fed 대차대조표(B/S) 축소 가설’ 두 개다. 먼저 AI 생산성 가설이다. AI 혁신이 노동생산성을 올리면 경제 공급 능력이 확장되고 그만큼 물가 압력은 완화된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통화정책의 ‘황금 해법’이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적어도 세 가지 허점을 안고 있다.
첫째, 생산성 향상은 ‘중립적 실질금리’(경기를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만드는 금리)를 높인다. 생산성 개선은 기업의 기대수익률을 높이고 그만큼 자금 수요도 함께 늘어난다. 돈 빌리는 기업이 증가하면 자연스레 균형금리도 오른다. 중립 금리가 오르는데 기준금리를 내리면 ‘완화’ 기조는 더 강화된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되레 확대될 수 있다.
둘째, 최근 AI 혁신은 공급보다 수요를 먼저 자극한다. 알파벳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5대 AI 빅테크 간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이 한창이다. 수요 증가가 공급을 앞서면 기준금리 인하는 인플레이션 가속 페달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1990년대와 단순 비교는 무리다.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인플레이션 안정 요소로 ‘정보기술(IT) 혁명에 따른 노동생산성 상승’을 짚었다. 그의 판단은 실제 관측된 생산성 지표와 기업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다. 반면 최근 AI 효과 논란은 여전히 통계로 입증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워시 지명자의 논리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내부에서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Fed 이사인 마이클 바는 “AI 붐을 기준금리 인하 근거로 보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다음으로 대차대조표 축소 가설이다. 워시는 B/S 규모를 줄이면 기준금리를 더 낮출 여지가 생긴다고 본다. 현재 Fed의 통화정책 수단은 크게 두 가지, 즉 ‘기준금리’와 ‘대차대조표’다. 보유 국채 매각으로 B/S가 축소되면 기준금리 인상과 유사한 긴축 효과를 낸다. 따라서 기준금리를 더 낮춰도 통화정책 스탠스는 종전과 같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금리 페달을 덜 밟고 B/S 페달을 대신 밟겠다는 구상이다.
이 가설 역시 반론에 직면해 있다. 미국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 수준이다. 전체 국채의 30%(약 9조4000억달러)는 외국인이 보유했다. 이럴 때 연준 B/S 축소 가속화는 채권시장 변동성을 키워 글로벌 금융시장 패닉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번스와 워시 사례의 공통분모는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다. 핵심은 금리 수준이 아니라 결정의 동기다. AI 낙관론이 임명권자 비위를 맞추려는 정당화 논리로 동원되면 시장은 이를 독립성 훼손 신호로 읽는다.
1997년 이전 한국은행법은 총재 자격으로 ‘금융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고매한 인품을 가진 자’를 명시했다. 이 조항이 삭제됐다고 정신까지 지워진 건 아니다. 통화정책의 신뢰는 결국 사람 문제다. 권력 그늘에 기대지 않는 단호함과 품격. 4월 임명될 새 한은 총재의 자격 조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