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덧대어 칠하며 완성되는 예술이다. 반면 조각은 정반대다. 미켈란젤로는 이를 두고 '대리석 속에 이미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 끝에 남겨진 본질만이 비로소 빛을 얻는다. 자연에도 이와 닮은 찰나가 있다. 달이 눈부신 광휘를 가려내는 순간 비로소 태양을 둘러싸고 있던 진줏빛 물결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소리로 공간을 채우는 연주라는 행위는 덧셈의 회화일까, 뺄셈의 조각일까. 혹은 스스로의 빛을 가려야만 본질이 드러나는 코로나의 역설일까. 지난 1월 21일 저녁, 카네기홀 와일 리사이틀홀 무대에 오른 첼리스트 한재민을 보며 이 질문이 떠올랐다.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사진. © Jennifer Taylor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사진. © Jennifer Taylor
260석 규모의 와일 리사이틀 홀은 연주자의 숨소리 하나까지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되는 투명한 공간이다. 무표정으로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멈춰선 한재민은 환한 미소로 청중들에게 인사했다. 그 순간 거침없는 에너지로 무대를 사로잡았던 젊은 시절 조영창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2006년생, 에네스쿠 콩쿠르 최연소 우승을 거둔 한재민은 현재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신동의 시기를 지나 차세대 거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다듬고 있다.

이날 공연을 관통한 단어를 꼽는다면 ‘긴장감'이었다. 그는 연주 내내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력을 유지했고, 경계선 위에 놓인 듯한 피치감을 바탕으로 날 선 감각을 곡 전체에 불어넣었다.

첫 곡 드뷔시 첼로 소나타는 청중으로부터 감동을 쉽게 끌어내는 낭만주의적 작품은 아니다. 한재민은 마디 단위로 표정이 급변하고 음의 도약도 예측을 뛰어넘으며 색채도 불분명한 이 작품에 담긴 '불안의 미학'을 예민한 감각과 단단한 테크닉으로 설득력 있게 구축했다. 마치 그의 현재를 정확히 비추는 거울처럼 보였다.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이어진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첼로 편곡 버전)는 듣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법한 연주였다. 고요하게 말을 건네는 피아노 위로 몽환적인 첼로 선율이 펼쳐진 도입부를 지나자, 한재민은 특유의 에너지를 밀도 있게 채워갔다. 중요 순간마다 그는 타협 없이 밀어붙였고, 견고한 음향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다만 치열함이 임계치를 넘어선 듯한 순간이 있었다. 주제 선율이 따스한 햇살처럼, 혹은 인간의 목소리처럼 스며들듯 순환해 등장하는 대목마다 장면의 전환은 흠결이 없었지만, 한 번 고조된 심박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강렬한 빛이 사물의 그윽한 음영을 지워내는 듯했다.

커티스와 줄리어드에서 공부한 인도네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자니스 카리사(Janice Carissa)는 한재민의 뜨거운 질주에 균형추가 되었다. 그는 첼로와 함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때로는 영롱한 톤으로, 때로는 감싸 안는 목소리로 음향의 이면을 면밀히 조명했다. 첼로가 극단적으로 여린 소리로 내려앉는 순간까지 넉넉하게 받아낸 그의 존재는 리사이틀의 완성도를 높였다.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마지막 작품인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는 드라마틱한 음향 대비와 비르투오소적인 기교를 요한다는 측면에서 한재민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었다. 기교는 정교했고, 음향의 대비는 극적이었다.

프랑크에서도, 프로코피예프에서도 밀도가 여백을 압도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러한 에너지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무대에서 한재민의 강점으로 또렷하게 부각될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대편성의 음향 속에서도 소리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앙코르로 연주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앞선 작품들과는 결이 달랐다. 섬세한 첼로의 선율을 타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 진줏빛 코로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하게 내려앉는 공기처럼 리사이틀은 고요하게 끝을 맺었다.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2025년 1월 21일, 뉴욕 카네기홀 리사이틀, 한재민(첼로) & 재니스 카리사(피아노) / 사진. © Jennifer Taylor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