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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 관통한 이건희 컬렉션…K컬처의 뿌리, 워싱턴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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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여점 국보급 보물 해외 첫 순회전
    1500년 관통한 이건희 컬렉션…K컬처의 뿌리, 워싱턴 홀리다
    18세기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빚은 ‘백자 달항아리’, 그리고 20세기 거장 김환기의 ‘푸른 점화’. 두 작품 사이엔 200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나의 예술은 모두 우리 도자기에서 나왔다”고 말한 김환기 선생은 평생에 걸쳐 달항아리의 둥근 곡선을 점과 선으로 승화했다. 지금 그 두 점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

    워싱턴DC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에서 오는 2월 1일까지 열리는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 전시는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기증품으로 구성된 국외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다. 3월에 시카고미술관으로, 9월에는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난다. 400여 점의 국보급 작품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단순한 전시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삼국시대 금동불상부터 조선의 인왕제색도, 현대의 김환기 박수근에 이르기까지 1500년 한국 미술사를 관통하는 걸작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다.

    K컬처가 전 세계에 확산한 지 수년째지만, ‘한국 문화의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K팝 가수들의 화려한 에너지, 영화와 드라마의 세련된 연출력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수천 년간 응축된 ‘한국의 미학적 정수’가 수세기에 걸쳐 도예로, 회화로, 조각으로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는 대서사로 풀어낸다. “아이돌 그룹의 군무가 K컬처의 꽃이라면, 곡선의 미학과 미니멀리즘이 살아 있는 한국의 예술 작품들은 그 뿌리에 가깝다”는 현지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문화예술이 곧 국격”이라고 믿은 한 수집가의 뜨거운 열망과 철학, 이 보물과 같은 기증품들을 어루만져 머나먼 땅에 무사히 내보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들, 그리고 인류 보편의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해외 미술관들의 호기심이 한데 모인 결과는 찬란하다. 첫 전시에 한 달여 만에 4만 명의 관람객이 모였고, 기념품은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구할 수 있는 풍경이 연일 펼쳐진다. 어쩌면 우리조차 몰랐던 한국 문화의 DNA에 세계가 열광하는 지금. ‘과거의 예술’이 긴 세월을 관통하며 ‘살아 숨 쉬는 대화’로 이어지는 장면 속으로 안내한다.

    "케데헌 속 그림 여깄네"…일월오봉도 실물 영접에 탄성 쏟아져
    워싱턴 홀린 한국의 보물…이건희 컬렉션 'N차 관람' 열풍

    ① 도슨트가 꼽은 관객이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 ‘일월오봉도’.
    ① 도슨트가 꼽은 관객이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 ‘일월오봉도’.
    “삼성의 다른 컬렉션도 궁금해졌어요. 삼성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 따로 있죠? 서울에 있나요?”

    이번이 세 번째 관람이라는 40대 여성 앨런은 관람 소감을 물어보자 오히려 질문을 쏟아냈다. 어원학자인 그는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박물관(NMAA·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sian Art)의 단골 관람객이다. 언어의 발전과 변화를 추적하는 그에게 NMAA는 살아있는 교과서인 셈이다.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전은 더욱 특별하다. 고대 한글(석보상절)을 만날 수 있어서다. “전시가 방대해서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개막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관람했고, 그다음엔 도슨트 투어를 했고 이번엔 혼자 보고 (전시를) 소화하기 위해 다시 왔어요.”

    이건희 컬렉션전을 향한 관심이 뜨겁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를 위시한 K컬처 열풍으로 한국문화에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열린 블록버스터급의 한국 문화재 전시라는 것도 있지만,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컬렉션’이 처음으로 해외에 왔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 관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NMAA 측은 매일 752명 정도가 관람한다고 밝혔다. 누적 관람객은 지난해 11월 15일 이후 올 1월 6일 기준 3만9880명에 달한다. 관람객 참여도도 높다. 매일 오후 2시에 열리는 도슨트 투어엔 평균 26명의 관람객이 참여하는데, 이는 작년 12월 열린 다른 전시 투어 참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

    전시는 ‘책가도’로 시작한다.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을 장식하던 책가도엔 진귀한 책, 도자기, 예술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온갖 보물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주는 것인데, 당시의 유행과 주인의 취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술관이 컬렉션으로 아이덴티티를 구축한다면 책가도는 주인의 그것인 셈이다.
    1500년 관통한 이건희 컬렉션…K컬처의 뿌리, 워싱턴 홀리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전은 이 책가도처럼 다양한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시간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약 1500년을 아우른다. 도자기, 서신, 고가구에서부터 회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방대하다. 국보 7점과 보물 15점을 비롯해 2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황선우 NMAA 큐레이터는 “이건희 컬렉션을 미국에 처음 소개하는 만큼 최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도슨트가 꼽은 관람객이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은 ‘일월오봉도’다. 어린이 관람객들이 금방 알아본다. ‘케데헌’의 루미가 공연할 때 배경으로 사용해서다. 현장학습으로 방문한 열 살 여자아이 아리언은 “케데헌을 10번도 넘게 봤다”며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왕의 뒷자리를 장식하던 그림이라고 해서 흥미로웠다”며 웃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일화가 담긴 보물과 국보도 나왔다.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 주전자’(국보)는 이 창업주가 생전에 가장 아낀 청자로 꼽힌다. 호암미술관에 30㎜ 두께 방탄유리 전시장을 마련할 정도였다. 고려시대 무신 가문인 최항의 무덤에서 도굴돼 일본으로 밀반출됐는데, 1970년 오사카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경매에서 이 창업주가 3500만원에 사들여 한국으로 들여왔다. 청자진사 연화문 주전자는 사실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독일 함부르크 공예박물관에 있고 다른 하나는 NMAA가 소장하고 있다. NMAA 설립 기반이 된 찰스 랭 프리어의 컬렉션 중 하나로 NMAA 한국관의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리움 소장품과 달리 NMAA 주전자는 뚜껑이 없고 주둥이 부분의 연꽃 줄기도 소실된 상태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 전시로 한 건물에 세쌍둥이 중 두 개가 모였다.

    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국보)와 ‘지장도’(보물)도 나왔다. 1978년 야마토분카칸(야마토문화관)에서 열린 ‘고려불화전’에 전시된 52점의 작품 중 일부가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창업주가 사들였다. 당시 일본 측은 한국에서 환수 여론이 불자 한국인의 구매를 금지했는데, 이에 이 창업주가 미국인 고미술 전문가를 고용해 낙찰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찾아올 수 있었다. 밀워키에서 연말을 맞아 가족을 만나러 워싱턴DC에 왔다는 70대 이호중 씨는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사실”이라며 “삼성이 아니었다면 (환수는) 불가능했다. 뉴스로만 접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이외에 김홍도 ‘추성부도’, 신윤복 ‘기녀출행도’, 정선 ‘인왕제색도’ 등 조선시대 대표 화가 작품을 비롯해 박수근 ‘농악’,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 이응노 ‘군상’, 김환기의 푸른 전면점화 ‘산울림 19-II-73#307’ 등 한국 근현대 주요 작가의 작품도 존재감을 자랑한다. 은퇴하고 친구들과 거의 매주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는 메릴랜드 출신 노부부는 “삼성을 다시 보게 됐다. 아시아의 전자 회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전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며 “기부를 통해 공공 컬렉션으로 만드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리 패밀리’가 컬렉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오늘 관람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컬렉션은 개인의 열정과 취향에서 시작하지만 그 마지막은 사회와 역사를 향한 헌정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처음으로 ‘컬렉터 이건희’의 이야기가 해외 관람객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전시는 오는 2월 1일 막을 내린 뒤 3월 시카고와 9월 영국 런던으로 이어진다.

    김보라 기자/ 워싱턴DC=이한빛 아르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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