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칼럼] AI가 1만권을 읽고 쓴 책
인공지능, 책의 저자로 본격 '등장'
콘텐츠 '양'과 '질', 모두 개선될까
김동욱 한경매거진&북 편집주간
콘텐츠 '양'과 '질', 모두 개선될까
김동욱 한경매거진&북 편집주간
아우어바흐의 사례는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자료의 ‘양’은 부차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풍부한 데이터는 핵심에 접근하거나 남과 다른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노이즈’만 양산하는 원흉이 될지도 모른다. 지적 행위의 결산인 책을 쓸 때, 데이터가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출판의 문턱이 낮아진 오늘날엔 자료가 부족해 진도가 나가지 못할 걱정을 더는 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에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는 자료의 ‘부족’보다는 ‘과잉’을 걱정할 처지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풍성해졌을 뿐 아니라 책을 쓰는 ‘손’도 빨라졌다. 다른 분야 못지않게 출판업에서도 인공지능(AI)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한 신생 출판사가 지난해 8월 이후 지난달까지 1년3개월 만에 무려 9431종의 책을 펴내 화제다. 이 출판사가 지난달 출간한 책만 129종에 이른다. 저자로 ‘인물출판 에디팅 팀’ ‘금융출판 에디팅 팀’ 식으로 표기돼 있지만 거의 전부를 AI가 집필했다고 한다. 펴내는 도서가 대부분 60쪽 안팎 분량에 불과한 전자책이라고는 해도 국내 출판 관련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는 실정이다. 매달 3~4종의 책을 내다가 이달에 5종을 출간하는 것만으로도 ‘과부하’가 걸린, 필자가 몸담은 출판사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출간량이다.
이 출판사의 사례가 극단적이어서 그렇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문장 일부분을 작성하는 수준부터 가상의 인물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까지 AI에 의존하는 껍데기만 인간인 저자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AI가 초벌 번역을 하거나, 교정·교열을 하는 것과 같은 보조자 역할에서 벗어나 창작의 주체로 전면에 나선 것이다.
전통적으로 책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의 경험과 사상, 감정을 글이라는 형태로 녹여내는 최고의 정신적인 작업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라고 해봤자 쓸 수 있는 분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쓰였는지, 오탈자나 오류는 없는지 검수할 틈도 없이 수많은 책이 쏟아지면서 책에 관한 오랜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일찍이 두보는 “만권의 책을 읽으면, 신들린 듯 글이 써진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라고 읊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수많은 텍스트를 서버에 구겨 넣은 AI가 토해내는 결과물을 두고 ‘신들렸다’고 칭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굳이 인간 작가를 제쳐두고 AI가 쓴 글을 읽을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AI가 사람보다 정확하고 빨라서일까. 아니면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창의성을 내비쳐서일까. 90년 전 아우어바흐는 한 줌의 자료 속에서 찬란한 통찰을 뽑아냈다. 방대한 데이터로 무장한 AI는 과연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을 넘어서는 작품을 쏟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