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 사이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 예술 이슈는 전 세계적인 ‘K-컬처 신드롬’이다. 신드롬은 장르를 망라해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대중음악이 세계인을 사로잡은 지는 이미 오래. 최근에는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으로 애니메이션까지 석권했다.
이 놀라운 현상의 저변에는 우리 말과 글이 있다. 사실 모든 문화 예술 콘텐츠의 근간은 ‘텍스트’다.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애니메이션 등 매체 예술들은 언뜻 보면 비주얼 또는 사운드가 핵심 같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결국 스크립트 즉, 대사와 가사 등 말과 글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자인 한국어와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K-컬처 부흥 시대는 등장조차 못 했을 수도 있다.
<2025 한글한마당 579돌 한글날 기념 패션쇼> / 제공. (주)이상봉
이상봉은 ‘K-컬처’라는 말이 존재하기도 전인 2004년부터 일생을 건 예술 화두로 ‘한글’을 택해 20년 넘게 독창적 세계를 구축해 온 뚝심 있는 패션 예술가다. 한글에 패션을 접목하는 것을 아무도 생각 못할 때부터 주목했다. 그리고 중단없이 지금도 계속 매진하고 있다. 579돌 한글날을 기념해 “알면 알수록 한글”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한글한마당> 축제에 이상봉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 한 예술가의 집념 어린 한글 사랑을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관(官)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공익적이다. 덕분에 주말 저녁 시민들은 광화문광장에서 20년에 걸친 이상봉 한글 패션 대표작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2025 한글한마당 579돌 한글날 기념 패션쇼> / 제공. (주)이상봉
10월 11일 토요일 저녁 <2025 한글한마당 579돌 한글날 기념 패션쇼>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진행됐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관람석으로 차용해 야외무대 이점을 극대화한 쇼는 얼굴을 베일로 감싼 미스터리한 여성이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마치 한복의 족두리를 연상시키는 머리 장식에 아리랑 한글 악보가 적힌 패션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그녀는 홀로 무대를 장악하며 춤인 듯 워킹인 듯 몽환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 시선을 홀리듯 사로잡았다. 인상적 오프닝으로 주목도를 끌어올린 후 본격적으로 남녀 모델들이 번갈아 무대를 이어받았다.
쇼 의상은 전반적으로 이상봉 시그니처 컬러인 블랙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화이트와 블루, 레드 등이 강렬하게 쓰인 의상들이 등장했다. 디자이너 이름인 ‘이상봉’이 뚜렷하게 쓰인, 또는 한글인가 싶게 이색적인 폰트 등 한글을 진지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풀어낸 패션들이 등장했다. 한글은 악보 디자인으로, 얼굴을 감싸는 베일에 은은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현됐다. 이상봉에게 들리는 음악이면서, 보이는 미술이면서, 읽히는 문자라는 한글에 대한 그만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사실 한글은 미학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문자다. 그래픽적인 요소가 강해 그대로 쓰기만 해도 독특하다. 이상봉은 바로 이런 점을 적극적으로 패션에 활용한다. 패션 예술가인 그에게 한글은 그 어떤 요소보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오브제다.
<2025 한글한마당 579돌 한글날 기념 패션쇼> / 제공. (주)이상봉
이날 패션쇼는 20년 넘게 계속된 ‘한글’을 주제로 한 이상봉 패션 대표작들이 한자리에 집대성됐다. 신작도 다수 선보인 무대는 어떤 옷이 과거의 옷인지를 식별하지 못할 만큼 동시대적이었다.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하얀 무대는 흑백의 강한 대비가 마치 이상봉의 그간의 예술 행로를 상징하는 듯 보였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암흑처럼 막막하다. 그러나 이상봉은 한글을 패션으로 승화하는 그 미지의 길을 20년간 묵묵히 걸었고, 이제 뒤돌아보니 그 발자취는 조명받은 런웨이처럼 환하다. 그러나 찬사는 뒤로 하고, 그는 다시 ‘한글 패션’이라는 외길을 또 묵묵히 걸어간다.
<2025 한글한마당 579돌 한글날 기념 패션쇼> / 제공. (주)이상봉
최효안 예술 칼럼니스트•디아젠다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