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떠올리면 하우스콘서트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들려준 연주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 공연보다 그 실황 음원을 하콘의 동료들과 함께 들었던 날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일본 교토의 한 다다미방에 모여 앉아, 창밖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 그 음악을 듣던 짧은 시간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렇듯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음악의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선율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만난 날의 공기와 온도, 함께했던 사람들과 연주자의 호흡까지 떠올리게 한다. 나에게는 에드바르 그리그의 현악사중주를 만난 날이 또한 그런 순간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어떤 역사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116회 하우스콘서트에서 연주하는 지겐 콰르텟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116회 하우스콘서트에서 연주하는 지겐 콰르텟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지겐 콰르텟이 안겨준 그리그 현악사중주의 강렬한 기억

2006년 4월 14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이 결성한 현악사중주팀이 116회 하우스콘서트에 올랐다. 프로그램은 그리그 현악사중주와 드보르자크 현악사중주 제14번. 지금 생각해도 한 무대에서 보기 드문 묵직한 구성이었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하우스콘서트 스태프 합류 2년 만에 처음으로 현악사중주 공연을 만나게 되었다. 리허설이 분주히 진행되는 가운데, 박창수 선생님의 입에서 한 마디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잘한다.”

그 한마디 때문이었을까. 내 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쫑긋 세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칭찬을 넘어 앞으로의 가능성을 전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나와 같은 또래였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불안을 느끼던 시절,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음악가로서 길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116회 하우스콘서트 지겐 콰르텟의 연주를 보고 흐뭇한 박창수 선생님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116회 하우스콘서트 지겐 콰르텟의 연주를 보고 흐뭇한 박창수 선생님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리허설과 공연을 거치며 내게 가장 강렬히 남은 것은, 이들이 연주한 그리그의 현악사중주였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만 발췌해 공개하던 당시의 영상 클립도 그리그 현악사중주의 마지막 악장을 꼽아 올렸다.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듯한 서늘함, 그리고 코앞의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네 연주자의 뜨거운 호흡은 지금도 그리그 현악사중주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되살아난다.

이 공연의 주인공은 지겐 콰르텟(Siegen Quartet)이다. 당시 이들의 팀 프로필에는 단 세 줄만이 적혀 있었다.

Siegen Quartet
- 2005 프라하 봄 국제 콩쿠르 2위, 현대곡상, 말러상 수상
-금호영아티스트 리사이틀
-KNUA홀 리사이틀


지겐 콰르텟의 리더, 노부스 콰르텟를 결성하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나는 한 공연장의 인턴을 거쳐 2008년 2월 금호문화재단에 입사했다. 금호아트홀 기획 공연 담당으로 처음 맡은 일은 공연장 리모델링 후 재개관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 3월 한 달간 사흘에 걸쳐 진행되는 공연 중 하나가 유독 내 눈길을 끌었는데, 새로 결성된 젊은 현악사중주단 두 팀을 한자리에 모아 하프(half) 콘서트 형식으로 선보이는 기획이었다. 그때, 각 팀을 소개하는 프로필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이었다.
116회 하우스콘서트 지겐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116회 하우스콘서트 지겐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김재영은 2006년 하우스콘서트에서 그리그 현악사중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지겐 콰르텟의 리더였다. 프로필에는 그가 2007년 동문들과 함께 노부스 콰르텟(Novus Quartet)을 결성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금호아트홀에서 새로 결성된 콰르텟을 마주하며, 하우스콘서트 이후 한동안 궁금했던 그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첫 직장에서 맡은 첫 공연으로, 2008년 3월 노부스 콰르텟이 팀의 시작을 정식으로 알리는 무대를 담당했다. 같은 해 11월 하우스콘서트에서도 노부스 콰르텟의 공연이 열렸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 현악사중주단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2008년 5월 오사카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순위 입상(3위)했고, 이를 시작으로 2012년 뮌헨 ARD 콩쿠르 2위, 2014년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 1위 등 ‘최초’와 상징적인 기록을 이어가며 한국 현악사중주단의 위상을 세워나간 것이다.

이들이 만든 눈부신 성과의 길목마다, 나는 하우스콘서트에서 만났던 지겐 콰르텟과 그리그 현악사중주를 늘 함께 떠올렸다. 지겐이 열어놓은 길 위에서 노부스가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갔다고 생각하니, 어떤 큰 흐름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205회 하우스콘서트 노부스 콰르텟의 하콘에서의 첫 연주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205회 하우스콘서트 노부스 콰르텟의 하콘에서의 첫 연주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노부스 콰르텟과 아레테 콰르텟, 그리고…

노부스 콰르텟은 결성된 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실내악 단체다. 몇 차례의 멤버 교체에도 흔들림 없이 발전해 왔으며, 위그모어홀 상주 단체 선정 등 새로운 이정표를 계속 세워가고 있다. 기획자로서는 이들이 열어간 길 덕분에 젊은 현악사중주단이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 흐름은 2020년, 하우스콘서트에 도착한 한 통의 메일을 통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시 한번 눈에 띄는 이름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아레테 콰르텟의 리더 박성현입니다.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 선생님을 사사하고 있습니다.”


간결한 인사말 끝에는 ‘김재영 선생님도 하콘에 연락해 보라고 하셨다’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 그 메일을 통해 지난 시간 동안 이어진 음악의 계보가 또 한 번 새로운 세대로 연결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우리는 그 메일을 받은 직후인 2021년 1월, 아레테 콰르텟(Arete Quartet)을 하우스콘서트에 소개했다. 또 하나의 젊은 현악사중주단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이후 아레테 콰르텟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며 국제무대에서도 주목받는 현악사중주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들 역시 노부스가 열어 놓은 길 위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813회 하우스콘서트 아레테 콰르텟을 처음 소개했던 2021년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813회 하우스콘서트 아레테 콰르텟을 처음 소개했던 2021년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1077회 하우스콘서트 아레테 콰르텟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1077회 하우스콘서트 아레테 콰르텟 / 사진. © 더하우스콘서트
여전히 나는 2006년 하우스콘서트에서 만난 지겐 콰르텟의 그리그 현악사중주 연주를 잊지 못한다. 그날의 무대는 노부스와 아레테로 이어지는 젊은 현악사중주단 계보의 시작이었고, 이후 수많은 팀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운 길을 내디뎠다. 누구도 선뜻 시도하지 않던 시절, 용기 있는 이들이 길을 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우스콘서트가 그들에게 첫걸음을 내딛는 무대이자, 세대의 흐름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보람을 느낀다. 노부스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듯, 또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갈 다음 세대를 기다리며, 앞으로도 그들의 여정을 기록해 나갈 것이다. 그리그의 현악사중주처럼 어떤 음악은 한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되기도 하니까.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