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야하다"…수십억 주고 산 '보물'에 무슨 일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생전 '황제'로 불렸던 그 남자가
몰락 후 다시 부활하기까지
부그로(William Adolphe Bouguereau)
몰락 후 다시 부활하기까지
부그로(William Adolphe Bouguereau)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지금 돈으로 수십억 원(당시 3만5000프랑, 1인당 GDP 기준 환산)에 팔려나갔습니다. 9년 뒤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은 40%나 오른 값에 낙찰됐습니다. 새 주인은 이 작품을 자신이 소유한 뉴욕의 최고급 호텔(호프만 하우스)에 걸었습니다. 덕분에 그림은 20여년간 수많은 거물들의 머리 위에서 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걸작이었던 이 그림은 어느샌가 대중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너무 야하고 촌스럽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작품은 40여년간 창고에 처박혀 있어야 했습니다.
명작은 언제 어디서나 명작이고, 그 가치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들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걸작은 다음 시대의 졸작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위대한 유산으로 취급받기도 하지요.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했던 수많은 화가들, 한때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쥐었지만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하게 잊힌 예술가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의 운명은 화가인 부그로의 삶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한때 프랑스 미술의 황제로 불리며 정점에 군림했던 부그로는, 인상주의를 비롯한 새 미술에 밀리면서 한때 ‘고리타분함의 대명사’가 됐다가 또다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부그로의 삶과 작품, 그리고 오늘을 잇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99등, 1등이 되다
부그로는 1825년 프랑스 서부의 항구도시 라로셸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엄격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화가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넌 평범한 사람이야. 가업을 잇거라.” 아버지는 부그로를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부그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미술학교 수업을 들었고, 퇴근 후에는 초상화와 음식 포장지에 들어갈 그림 등을 그려 돈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스물한살이 되던 1846년, 부그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꿈에 그리던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곧바로 부그로는 프랑스 최고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결과는 합격.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적힌 100명 중 부그로의 이름은 아흔아홉 번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시작은 결코 아니었지요. 당대 최고의 재능들이 모여들던 치열한 파리 미술계에서, 이 정도의 애매한 실력으로는 살아남기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으니까요.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모든 젊은 화가들이 꿈꾸던 로마상(Prix de Rome)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매년 작품 경진대회를 열고 각 분야에서 1등상을 받은 학생을 로마로 유학보내 줬습니다. 로마상을 받는다는 건 고대의 걸작들을 직접 보며 실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이자, 당대 최고의 재능으로 공식 인정을 받는 영예였습니다. 부그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처절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로마에서의 3년 4개월은 부그로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그는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조금은 즐겨도 좋으련만, 부그로는 지독하게 성실했습니다. 이를 본 친구들은 그를 시시포스(Sisyphu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윗돌을 밀어올리는 중노동을 묵묵히 견디는 인물. 그런 시시포스처럼 하루하루를 작업에만 쏟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동료는 부그로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극도로 성실했으며,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 지독한 노력 덕분에 1854년 프랑스로 돌아온 부그로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졌습니다.
세상이 무너질 때
서른 살이던 1855년, 부그로가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순교자의 승리’는 엄청난 찬사를 끌어모았습니다. 99등으로 시작했던 청년은 이제 1등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정점에 선 부그로의 삶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시작은 1872년 갓 태어난 넷째딸이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열여섯 살의 장남이 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부그로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담은 걸작 ‘피에타’(1876)를 그립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77년 4월 아내가 다섯째 아이를 낳은 뒤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달 뒤 아이마저 어머니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함께 잃은 부그로는 ‘위로의 성모’(1877)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 마리아의 발밑에는 죽은 아기가, 무릎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기절한 듯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피에타에서의 분노 대신,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슬픔이 화면을 감쌉니다. 이 작품은 부그로의 생전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울은 기울고
개인적인 슬픔과 별개로, 프랑스 미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부그로의 영향력은 굳건했습니다. 부그로는 자신이 졸업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이자 사설 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의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화가를 길러냈습니다. 하지만 미술계 한편에서는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그 움직임의 이름은 인상주의였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진실이 존재하고, 예술가는 이를 ‘완벽하게 잘 그리기 위해’ 평생 단련해야 한다는 게 부그로의 신념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 부그로의 눈에 “끊임없이 변하는 빛의 순간을 포착하겠다”며 거친 붓질로 형태를 뭉개버리는 인상주의는 예술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부그로는 그런 사기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갈등은 격화됐습니다. 부그로는 인상주의를 “밑그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드가와 고갱 같은 화가들은 부그로의 비현실적으로 매끈한 화풍을 조롱하며 ‘부그로스럽다’(Bouguereaute)는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술사의 저울은 서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전 예술의 ‘익숙한 완벽함’에 질려가고, 급변하는 시대의 공기를 담아낸 인상주의에 점점 더 매혹됐습니다. 인상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부그로의 작품은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골동품에 불과했습니다.
1900년 아들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부그로는 다섯 자녀 중 넷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말년에 심장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1905년, 8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부그로의 명성은 갑자기 곤두박질칩니다.
우리 모두 부그로다
그건 결코 부그로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부그로는 최선을 다했고 탁월한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그가 살았던 세상에서 훌륭한 화가란 ‘그림을 사실적으로 잘 그리는 화가’. 그래서 부그로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철저한 수련을 쌓았고 성공을 거뒀습니다.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 사진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미술은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러일으키는 미술, 우리의 마음에 충격과 감동을 주는 미술, 새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미술을 요구했습니다. 매끄럽고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은 ‘옛날 그림’에 불과했지요.“아름다움이 어떻게 변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일은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벌어집니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굳게 믿었던 가치와 성공의 법칙도 바뀝니다. 한때 전국에 1만7000명이나 됐던 버스 안내양이 지금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것처럼, 매표소 직원들과 계산원들이 무인계산대와 키오스크로 대체되고 있는 것처럼요. 이런 변화는 통제할 수 없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최근 생활 곳곳에 파고든 인공지능(AI)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그로가 세상을 떠난 뒤 겪은 불행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되면서 사실적인 그림의 수요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부그로가 살아있을 때 중요했던 것들은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인상주의 작품의 가격은 부그로 작품보다 훨씬 비쌉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수많은 관객을 클라크미술관으로 끌어모아 감동을 줍니다. 이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 올린 실력 덕분입니다. 이렇듯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오랫동안 살아남습니다.
그는 생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작업실에 갑니다. 저녁에는 어둠 때문에 작업을 멈춰야 해서 안타깝고, 다음 날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중략) 내가 사랑하는 그림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없다면 그건 비참한 일일 겁니다.” 젊은 시절 별명인 ‘시시포스’처럼, 그는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며 스스로 구원을 구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충실한 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불안과 허무를 이겨내는 비결은 그 성실함에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William Bouguereau(Louise d’Argencourt 등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