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 염색 얘기부터 하자면 이렇다. 지피티가 새치 샴푸를 소개해줬다. 주 2회 사용하면 2주 지나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봉숭아 물처럼 물든다니, 솔깃했다. 그런데 팔지를 않는다. 리뷰는 있지만 구매처는 없다. 기업에서 안 만든다는 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는 얘기다. 샴푸 후 주변 정리에 품도 많이 들고, 효과도 천천히 나타나니 결국 ‘두피가 따끔한 염색약’으로 돌아온 사람이 많다고 한다.
결국 나는 다시 거울 앞에서 새치 마스카라를 들었다. 앞머리는 보이니 그럭저럭 되는데, 옆과 뒤는 손거울을 비추고 고개를 꺾어가며 쓱쓱 칠한다. 정말이지, 우아하게 산다는 건 너무 피곤하다.
라울 뒤피 <Open Window> (1928) / 그림출처. Wiki Art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
요즘은 새치만 문제가 아니다. 배가 나오면 그건 인격이 아니라 게으름이고, 얼굴 피부 결은 거의 평준화됐으니 이제는 머릿결과 목의 피부에서 격이 갈린다더라. 하다 하다 발뒤꿈치 관리 크림도 알게 모르게 다들 갖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하나 있다.)
이렇게 쓴다고 해서 멋쟁이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저 초라해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옷은 주기적으로 새것을 사야 한다. 아무리 깨끗하게 입고 다려도 천이 낡으면 전체가 후줄근해 보인다. 환경에 미안하지만, ‘오래된 깔끔한 옷’으로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회학 필독서인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 지음)에서는 ‘소비는 개별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강제’라는 취지로 말했다. 내가 새치 마스카라를 사고 발뒤꿈치 크림을 구비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회적 의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헬스장에서 운동복 브랜드를 확인하고, 스킨케어 루틴을 챙기며 머리 스타일링에도 신경 쓴다.
그래서 내가 쓰는 방식은 기본 이상 품질이 보증된 매장에서, 상·하의 하나에 3~5만원 선에서 무난하되 지루하지 않은 옷을 고른다. 새로운 직장 생활을 앞두고,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매장을 돌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고른 건 스누피가 그려진 와인색 티셔츠였다. 와인색이 제법 어울리는 드문 케이스이기도 하고, 내 출생 연도와 같은 숫자(원작이 그려진 해)가 들어 있어 괜히 기념하고 싶었다. “내 나이가 어떠냐, 나는 드러내련다.” 도시에서 버티는 데는 그런 ‘쓸모없는 숨구멍’이 생각보다 단단한 기둥이 되어준다.
소비, 기호, 그리고 압박
우아하게 살아가는 것의 피로함은 어쩌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귀티’가 얼굴과 손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머릿결, 목선, 발뒤꿈치에까지 확장되었다. 새치 한 가닥에도 사회적 시선이 붙는다.
‘우리는 사물의 유용성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이를 갈망하는 욕구를 소비한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새치 마스카라 하나도 그저 회색 머리카락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관리되는 몸’이라는 기호를 사는 일이다. 오늘날의 피로는 바로 사물과 서비스를 통해 “ 기호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 압박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시간 매장 쇼핑과 새치 마스카라로 질서를 유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누피가 그려진 와인색 티셔츠를 고른다. 중년 여성이 컬러 없는 만화 티셔츠를 입고 포멀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지 따위는 잠깐만 생각한다. 중요한 건, 그 옷이 나를 웃게 한다는 사실이다.
라울 뒤피 <The Grid> (1930) / 그림출처. Wiki Art귀티도 우아함도 아닌 그 무엇
요즘 유행하는 ‘부자처럼 보이기’의 다른 이름인 ‘귀티’라는 단어는 사람에 값을 매기는 기분이 든다. 귀티니, 우아함이니 하는 말들이 다 거창하지만, 결국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아닐까. 미감 추구 역시 인간과 예의의 기본이긴 하니까.
도시에서 버티기 위한 우아함 속에서도 쓸모없는 숨구멍은 필요하다. 스누피 티셔츠처럼 시스템의 기준을 살짝 벗어나, 나만의 작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그 숨구멍까지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우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