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리뷰] ▶▶▶ 절대적인 사랑의 가치란 무엇인가

프랑스 별종 감독의 별난 영화로 취급받는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라틴어로 자비라는 뜻)>는 전복(顚覆)의 영화인 건 분명해 보인다. 중세 이후 유럽 사회가 1천 년 이상 유지해 온 종교적, 윤리적 가치관을 한 번에 뒤집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뒤집는 방식이 다소 거칠다. 조금 이리저리 흔드는 꼴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한번 지나가는 농담쯤으로 그러는 건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것이 알랭 기로디의 의도였을까. 꼭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알랭 기로디는 꽤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인물로 보인다. 생래적으로 무엇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인물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이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는 자신의 시골 생활 속(그는 농부 집안에서 자랐다)에서 경험하거나 봐왔던 것, 일정한 경험과 실체가 있는 얘기에서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성장 배경을 녹여 2021년 소설 『라발레르』를 펴낸 바 있다. ‘라발레르’는 집에 가만히 머물지 않고 항상 돌아다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미세리코르디아>는 놀랍게도 툴루즈 근교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얘기이다. 영화가 지닌 외견과 달리 서스펜스가 상당하다. 이렇게 긴장감이 높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서스펜스의 상당량이 다른 것도 아니고 섹스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 간의 성적 긴장감은 ‘세상에 이럴 수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건 마치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혹할 만큼 생생했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엄마가 자기 친구를 찾아가 아들과 좀 자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생경함 같은 것이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주인공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고향 마을에 돌아오자 그의 어릴 적 친구인 뱅상(장 밥티스트 뒤랑)은 그가 자신의 엄마 마르틴(카트린 프로)과 섹스하고 싶어 한다고 의심한다. 또 다른 어릴 적 친구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와 함께 셋은 묘한 삼각관계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주인공 제레미는 이 마을에서 오랜 기간 제빵사로 일했던 장 피에르 리갈(세르주 리샤르)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온 것이다. 장 피에르는 제레미를 양아들처럼 키우고 제빵을 가르쳐 대도시인 툴루즈로 내보냈던 것쯤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보다 복잡해 보인다. 피에르와 제레미는 의사(擬似) 부자이면서 연인관계(제레미가 장 피에르 생전에 이를 고백은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아들 격인 제레미가 양아버지뻘인 피에르를 더 사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제레미는 피에르의 아내이자 자신의 엄마 같은 존재인 마르틴과 옛 앨범을 뒤적이면서 자꾸 피에르가 수영복 팬티만 입고 해변에 서 있는 사진을 쳐다본다) 뱅상은 친구 제레미가 자신의 엄마와 섹스하는 사이가 돼서 아버지의 빵집을 통째로 먹으려 한다고 의심한다. 왈테르가 뱅상과 자는 사이라고 의심하는 제레미는 어느 날 그의 집에서 왈테르를 유혹하려 한다. 게다가 이들 사이를 모두 꿰뚫고 있는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급기야 제레미와 한 이불속에 들어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야기가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일상의 공간이 고립된 작은 커뮤니티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다지 말이 안 되는 얘기까지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주어진 시스템의 윤리학으로 이렇게 저렇게 재단하는 습성으로 본다면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일본 사회가 근친 섹스에 대한 성적 욕망이 대단한 것 같지만 그건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거나 사라진 시골 마을에서의 생식 본능이 만들어 낸 사회학적 산물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분석적으로 보면 이해 못 할 세상의 이치는 없다. 알랭 기로디는 그런 의미에서 전복의 일상화, 일상의 전복화를 통해 실제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 하는 셈이다.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키워드는 의심과 추궁이다. 제레미는 뱅상의 살해범으로 의심받는다. 이 초보 살인자는 주변 모두에게 의심받아도 충분할 만큼 어리숙하다. 앞뒤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 그런데 매일 새벽 곰보버섯을 캐러 다니는 신부도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게다가 그는 경찰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이 젊은 남자를 탐하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범인을 찾으려는 경찰의 수사를 교란하고 방해한다. 왈테르는 왈테르대로 뱅상을 두려워했던 일이 있어 보인다. 그 둘은 ‘자는 사이’였을 수 있다.

제레미는 슬쩍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을 왈테르에게 넘기려고 수작을 부리지만 거꾸로 자신이 뱅상을 죽였다는 확신을 왈테르에게 주게 된다. 추궁은 일대일, 일대다, 다대일로 이어진다. 추궁의 에피소드를 다방면으로 직조(織造)해 내는 알랭 기로디의 능력이 남다르다. 이건 스토리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 느낌, 아우라의 문제인데 의심과 추궁의 분위기로 기로디는 극의 중반 이후를 꽉 조이게 만든다. 이런 류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영화가 어려운 텍스트는 아니다. 알랭 기로디가 도통 왜 이러는지 극 마지막 부분에 신부 필리프의 대사로써 대체로 설명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며 생을 끝내려는 제레미에게 ‘양심과의 합의’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이렇게 부연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봤나요? 굶어 죽는 아이들과 길 위의 노숙자들을? 이 세상은 멸망해 가요. 몇십 년 안에 지구에서 생명이 사라지겠죠. 그래도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축구장에도 가요. 우린 다 그 학살의 책임자고 모두가 그걸 알아요. 죽음은 악한 게 아니고 삶은 끝나게 돼 있어요. 뜻밖의 죽음이 필요해요. 우린 사고가 필요해요. 우린 살인이 필요해요.”

이쯤 되면 무정부주의의 극치이다. 이탈리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알랭 기로디는 세상의 빠른 멸망, 그에 따른 세상의 빠른 재건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인바 사제가 그 과정을 몸소 실천하라고 얘기하며 더더욱 그것이야말로 ‘미세리코르디아’, 곧 자비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랭 기로디는 자비란 신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임을 강조하려 한다. 제레미는 ‘거짓말로 평생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신부인 필리프는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살인자를 매일 보는 낙으로, 무상의 사랑으로 영원히 침묵하며 살겠다”고 말한다. 신부는 젊은 제레미가 결국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산책도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 말한다. 자비 역시 신의 뜻이거나 사회적 행동이 아닌 개인의 지극한 욕망, 그 자체가 동인이라는 것이다.
시골 빵집의 살인 서스펜스…신이 아닌 '욕망'이 베푸는 자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엔딩 장면 가지고도 말이 많은 영화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그다지 큰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알랭 기로디조차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심스러웠을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자비롭게, 조금은 따뜻하고, 조금은 다정하게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미세리코르디아>는 어마어마하게 흥분할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생경함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연출의 에너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가 맞다. 소설을 쓰다가 길을 잃은 자,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하듯이 영화를 하면서 길을 잃은 영화학도들은 영화를 보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 영화마니아들, 영화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닌 소수의 영화학도들, 영화 지식인들 용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 1만5천 이상을 모았다. 국내 관객들의,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아이러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메인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