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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걸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을 꿈꾸다, 도쿄 국제 어린이 도서관
[arte] 박정민의 열린 공간과 사유들
삶을 공간과의 싸움으로 바라본다면?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책을 읽는 공간에 대한 탐구 '도쿄 국제 어린이 도서관'
삶을 공간과의 싸움으로 바라본다면?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책을 읽는 공간에 대한 탐구 '도쿄 국제 어린이 도서관'
그건 바로 공간에 대한 감각이다.
그것을 앗아간 주범 중 하나는 분명 속도다. 속도는 공간에 대한 지각을 무디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 슈퍼카나 제트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전해지는 네트워크의 속도다.
벗어날 수 없는 내 몸, 그리고 그걸 둘러싼 공간을 온전히 지각하고 인지하는 것보단 리모컨이나 터치패널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아름다운 휴양도시 속으로 의식을 밀어 넣는 편이 손쉽게 유토피아로 건너가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영상이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영상의 문법은 대체로 공간과 관련이 있다. 180도의 법칙, 30도의 법칙, 지금 내가 존재하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에 내 의식을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에 만들어진 법칙들이다. 그렇기에 그 법칙을 잘 파괴한다면 오히려 멋진 문법이 탄생한다.
하지만 요즈음 영상은 그저 현란함이라는 수사법을 구사하기 위해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카메라를 뒤흔들고, 방향을 바꾸며 광각 렌즈의 왜곡을 활용한다.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혁신은 전통을 이해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요즈음 영상은 그저 전통을 철 지난 폐기 처분의 대상쯤으로 여긴다.
마지막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작가들이 공간보다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는 점이다. 많은 작가가 인생을 시간과의 싸움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그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상이란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또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하며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던 시간과 싸우려 드는 용맹함의 숙명은 링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면 어떨까? 인생이 시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간과의 싸움이라고 말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책을 읽는 공간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그런 가설하에 삶을 바라볼 때 너무나도 매력적인 개념이다. 그는 헤테로토피아가 다른 모든 공간에 이의를 제기하며 양립 불가능한 여러 공간을 한 장소에 겹쳐 놓은, 열려있지만 동시에 닫혀있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유토피아다. 하지만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와 달리 만질 수 있고 걸어 들어가고 숨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백지장의 사각형 속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또는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가 있는, 사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리저리 잘려졌으며 얼룩덜룩한 공간 안에서 살고 죽고 사랑한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2014)
‘열람실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그들은 책에 빠져있다. 책장 사이에 파묻혀 가끔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잠을 자며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뒤척이는 사람들 같다. 아, 책 읽는 사람들 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2010)
한국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공공 도서관은 언제나 문전성시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면 책 읽을 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자리는 두 층 높이의 거대한 통창을 면하고 있는, 내 몸을 꼭 안아줄 듯이 품을 벌린 갈색의자가 있는 곳이다. 창밖으로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소위 ‘숲 뷰’가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앉게 되는 행운을 누려도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인지는 잘 모르겠다. 의자에 몸을 넣으면 상체가 약간 비스듬한 자세가 되는데 그 눈높이에는 두꺼운 회색의 프레임이 있다. 그리고 활짝 열린 그 창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어두운 구석이 없어 오히려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이 의자의 뒤편은 열람실을 오가는 주요 통로여서 그 소음도 많이 들리는 데다가 앉아 있다 보면 뒤편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들린다. 이곳의 인기는 앉아서 책을 읽는 것도 있지만 그 모습을 촬영해서 보여주기에 좋다는 측면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도서관의 평면을 그린 사람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 도쿄 국제 어린이 도서관
스스로 푸른 빛을 내는 듯한 기다란 유리 상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100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입구가 있다.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개의 문을 통과하는 느낌은 마치 두 개의 시간대를 건너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에노 공원의 건너편에 있는 이 국제 어린이 도서관은 우에노 도서관의 개보수 프로젝트였다. 20세기 초에 축조된,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공간을 관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기존의 외벽이었던 하얀 타일로 마감된 벽은 내벽이 되고, 그 반대편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새로운 외피가 씌어졌다.
두 개의 시간이 흐르는 이 복도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걸까? 그 끝에는 각층을 연결하는 계단 공간이 있고, 나뭇잎을 투과해 스며든 푸르스름한 빛이 감돈다. 왠지 거기까지 걸어가면 또 다른 공간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사진을 촬영해도 되는 곳은 이 통로들이다. 열람실에서는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
중정으로 나서면 아치동의 거대한 커튼월이 주변 풍경을 수십 개의 면으로 쪼개고 반사한다. 그 아치를 따라 걸으면 그 모습이 동시에 움직이기에 마치 나와 상호작용 하는 아트월처럼 느껴진다. 철제 프레임에 유리가 끼워진 익숙한 구조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교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층고와 유리의 높이가 동일하게 만들어져있고, 이 직사각형의 비례는 거의 모든 공간에 동일하게 반영되어 있다.
가끔 요즈음 신축 주거들을 보면 최신 기능을 내세우는 가전제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막상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입구에서부터 혼재된 시각적 패턴에 어지러워진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만 보더라도 수직적 패턴과 수평적 패턴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어차피 계속해서 더 높아지는 쪽으로만 이 도시를 만들어갈 것이라면 거기에 트라스 레귤라퇴르의 개념만 적용해도 도시가 조금은 아름다워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시학>에서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새소리 모두 음향적 요소로서 음악을 환기시키지만, 음악이라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 소리는 아직 음악의 약속에 불과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면 어떤 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중략) 이리하여 자연의 선물에 인위적인 혜택이 더해지니, 이것이 곧 예술의 일반적인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시학』 (2015)
좋은 건축에 숨어있는 기하학적 특성은 복잡하고 불가해한 세상을 단순한 기본 형태에서부터 출발하여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지성을 단지 지식의 양으로 측정한다면 건축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성을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생각한다면 건축도 사람을 키울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