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 리는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계 지휘자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다. 2024/25 시즌까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의 부지휘자로 활약했던 그는 2022년부터 미국 앤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A2SO)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얼 리를 아르떼가 만났다.
앤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지휘자 얼 리. / 사진출처. 얼 리 홈페이지.
앤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지휘자 얼 리. / 사진출처. 얼 리 홈페이지.
얼리는 지난달 열린 뉴욕 필하모닉 내한 공연의 부지휘자로 한국을 찾았다. 이 공연의 지휘를 맡았던 에사페카 살로넨이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일정 소화가 어려울 때 대신 무대에 오르는 역할이었다. 얼 리는 2022년 뉴욕 필하모닉의 설날 공연을 맡으면서 이 악단과 신뢰를 쌓았다. 그는 지난 3월 LA 필하모닉이 연 말러 음악 행사에서 콜번 음악 학교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2번을 연주해 음악매체인 바흐트랙에서 별 5개 만점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뉴욕 필하모닉이 이번 내한 공연에서 얼 리에게 뒤를 맡겼던 배경이다. 그의 부인인 플루티스트 손유빈은 뉴욕 필하모닉에서 2012년부터 활동한 중견 단원이다.

손을 다친 첼리스트에서 BSO의 부지휘자로

전남 여수 출생인 얼 리는 11세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한국 이름은 이얼. 그가 음악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데엔 초등학교 2학년 즈음에 봤던 영상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레이저디스크로 보여준 ‘요요 마 앳 탱글우드’란 1990년 다큐멘터리였다. 탱글우드 음악제는 미국 메스추세츠주 레녹스에서 BSO가 요요 마, 수잔 그레이엄, 랑랑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함께 해왔던 축제다. 얼 리는 “요요 마란 동양인이 미국 악단과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이 매우 행복해보였다”고 말했다.

첼리스트로서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얼 리는 필라델피아 커티스와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을 거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시련은 2008년에 찾아왔다. 석사와 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마쳤던 때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육 문제로 왼손이 말을 안 들었다. 지금도 현을 잡으려 할 때면 일부 손가락이 말려 들어간다고. 3년에 걸친 치료에도 별 차도가 없자 그는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러자 필라델피아 커티스에서 만났던 지휘자 선생님이 생각났다.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분이지만 지휘만큼은 계속 떠올랐다고. 얼 리는 맨해튼 음대,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 들어가 지휘를 배웠다.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레녹스에 있는 공연장인 탱글우드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를 지휘하고 있는 얼 리. / 사진 출처. BSO.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레녹스에 있는 공연장인 탱글우드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를 지휘하고 있는 얼 리. / 사진 출처. BSO.
지휘봉을 들게 된 얼리는 2015년 캐나다 토론토 심포니의 상주 지휘자를 3년 임기로 맡는다. 2018년부터는 다시 3년간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2021년엔 BSO의 부지휘자가 됐다. 이 여정을 거치며 만났던 지휘 대가들은 가르침을 줬다. “제일 많이 본 지휘자는 안드레스 넬손스였어요. 연주자들을 많이 통제하려 하려는 분은 아니셨어요. 단원들이 편안하고 기분 좋게 연주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각자의 개성에 맞는 장점을 끌어내는 스타일이셨죠. 리허설에서도 가족같이 편하게 단원들을 대하셨어요.”

BSO 부지휘자가 된 뒤엔 1년에 두 차례씩 이 악단과 공연을 했다. 지난해엔 탱글우드 무대에 어렸을 적 TV로 봤던 요요 마와 함께 올랐다고. 유년 시절 품었던 지휘자로서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얼 리는 BSO의 공연장이 주는 매력에도 빠져들었다. 이 악단은 세계 3대 공연장으로 불리는 보스턴 심포니 홀을 무대로 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이었던 게반트하우스를 벤치마킹해 1900년 지어진 건물이다. 얼 리는 “요즘 지어지는 홀들은 균형감이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좋다 보니 녹음된 듯한 소리가 날 때가 있다”며 “반면 보스턴 심포니 홀은 리허설 할 때는 소리가 지나치게 울리지만 객석이 채워지면 소리가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레녹스에 있는 공연장인 탱글우드에서 첼리스트 요요 마(왼쪽)와 지휘자 얼 리가 손을 맞잡은 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출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레녹스에 있는 공연장인 탱글우드에서 첼리스트 요요 마(왼쪽)와 지휘자 얼 리가 손을 맞잡은 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출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
현대음악 어떻게 전할까 고민

악보를 받으면 얼 리는 우선 첼로를 연주해 어떤 소리가 나는지를 본다. 작품 해석에서 중시하는 건 템포다. 지휘자가 놓쳐선 안 될 기본이면서도 방향성 잡기가 어려운 일이 템포를 잡는 거라고. 곡의 전체적인 개념이 잡히면 작곡 배경을 탐구한 뒤 리허설에 들어간다. “만프레드 호넥의 리허설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요. 호넥은 녹음 엔지니어를 두고 모든 리허설을 녹음해갔어요. 그러곤 녹음본을 들어보며 자산이 추구하는 소리가 나오는지를 살펴보더라고요. 저도 기회가 되는 대로 그렇게 하려 해요. 녹음된 걸 듣다 보면 다음 연주에서 개선할 부분을 찾느라 생각할 게 많아져요.”

좋아하는 작곡가를 꼽아달란 질문엔 장고 끝에 베토벤과 바흐를 골랐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도 좋아한다고. 진은숙이나 신동훈처럼 한국인 작곡가의 곡에도 관심을 가져 이들의 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얼 리는 A2SO의 음악감독으로 일하게 되면서 여러 레퍼토리를 시도해볼 기회가 많아졌다. A2SO는 1928년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에서 창단한 악단이다. 이 악단은 2025/26 시즌에 타케미츠 토오루의 ‘현악기를 위한 레퀴엠’, 가브리엘라 레나 프랑크의 ‘엘레지아 안디나’, 진은숙의 ‘퍼즐과 게임 모음곡’ 등 현대 곡을 연주한다. 오는 11월 클라라 주미 강과, 내년 2월 대니 구와의 협연도 준비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를 지휘하고 있는 얼 리. / 사진 출처. BSO.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를 지휘하고 있는 얼 리. / 사진 출처. BSO.
얼 리는 관객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음악을 다룰 땐 관객들에게 익숙할 만한 곡을 하나씩 섞어 프로그램을 짠다. 관객들이 익숙함과 신선함 모두를 얻어갔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작곡가가 살아 있는 경우엔 작곡가가 관객들에게 작품을 직접 설명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앤아버는 공연 기획이 발달한 도시인 만큼 악단도 프로그램 구성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게 얼 리의 설명이다. 앤아버는 미국 3대 공연기획단체로 꼽히는 대학음악협회(UMS)가 위치한 도시다. 1880년 설립된 UMS는 앤아버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등 유명 악단의 공연을 유치해왔다.

얼 리는 오는 9월 한국 관객들과도 만난다. 통영국제음악제(TIMF) 앙상블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이렇게 보면 워커홀릭 같지만 그는 “가족이 먼저”라고 말하는 딸 바라기다. 취미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담는 피사체도 2020년생인 딸이다. 딸도 피아노를 배우면서 아빠와의 접점을 늘리고 있다고. “아내도 연주를 하러 다니고 저도 틈틈이 곡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해요. 물론 더 큰 악단을 이끌어보고 싶단 생각도 하죠. 하지만 전 손을 다치면서 첼로를 놓아본 적이 있잖아요. 그땐 음악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어요. 그래서인지 서두르기보단 꾸준히, 빠르지 않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