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JOB 담배 종이 광고 포스터>, 1898,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런던
알폰스 무하, <JOB 담배 종이 광고 포스터>, 1898,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런던
매혹적인 한 여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고개를 살짝 젖힌 채, 나른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의 긴 머리칼은 연기처럼 흘러내리고, 손끝에선 진짜 연기가 지그재그 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다. 이토록 우아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이며,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만난 무하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제목을 본 순간 ‘앗 낚였다!’ 담배종이회사 광고였다니. 그런데 1890년대, 프랑스의 담배종이회사 ‘JOB’의 의뢰로 제작된 이 포스터는, 광고하는 제품에 대한 설명도 가격도 없다. 대신 오직 한 여인의 관능적인 몸짓, 묘한 시선 처리, 긴 머리카락, 반복되는 연기만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온통 보랏빛인 이 이미지 속에서 상업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진다. 담배 연기는 상품이 되고, 여성은 소비의 매개가 되며, 광고는 예술의 옷을 입는다. 이 작품에서 알폰스 무하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담배의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 부드러운 색조와 섬세한 디테일을 활용했다. 특히 여성의 머리카락과 의상에 사용된 곡선과 나선형의 패턴은 아르누보 특유의 디자인적 요소를 잘 드러내고 있다. 포스터의 배경과 글자는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으며, 이는 무하의 탁월한 디자인 감각을 보여준다.

도상학적으로 볼 때, 무하가 그린 이 여인은 단순한 ‘흡연자’가 아니다. 그녀는 욕망의 주체이자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존재이다. 기존 담배 광고가 남성 중심의 유혹 구조였다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 그녀는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연기를 피우고, 그 연기라는 공간 속에서 꿈꾼다. 이 장면은 흡연이라는 행위가 단순한 기호의 소비가 아닌, 정체성과 성별, 미학의 상징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담배를 피우는 이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혹시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따라 피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지 않는가? 무하의 그림은 아름답다. 하지만 바로 그 아름다움이 어떤 불편함을 남긴다. 광고 포스터이면서 예술작품인 위 이미지는 여성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소비의 도구이기도 하다. 담배는 이 장면 속에서 하나의 유혹으로 기능하지만, 시대가 바뀐 지금 우리는 묻게 된다. “이런 광고가 지금도 가능할까?”

2025년,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인 퐁다시오 루이비통에서 개막한 데이비드 호크니 25의 대규모 회고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전시를 홍보하기 위해 준비된 포스터에는, 호크니 본인이 그린 작품이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제목은 〈연극 속의 연극과 담배를 피우는 나〉. 그림 속 호크니는 평소의 모습대로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 실제의 호크니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포즈로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연극 속의 연극과 담배를 피우는 나> (2024-2025) / 이미지 제공. © David Hockney
데이비드 호크니, <연극 속의 연극과 담배를 피우는 나> (2024-2025) / 이미지 제공. © David Hockney
그런데 파리 지하철 역사에 걸릴 예정이었던 위 포스터에 대하여, 프랑스 정부는 이 포스터가 흡연을 미화한다는 이유로 파리 지하철 역사 내 부착을 불허했다. 프랑스 공중보건법전 제 L3511-3조는 모든 형태의 직·간접 담배 광고 및 판촉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으며, 예술적 맥락이라 해도 공공장소에 전시되는 시각 이미지가 광고 효과를 유발할 경우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호크니의 자화상이 담배를 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이미지가 ‘광고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하루에 100개비의 담배와 시가를 피우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평소에 “담배는 자유의 상징이자 우리 사회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던 호크니는 강하게 반발했다. “예술은 항상 표현의 자유를 향해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린 흡연 장면은 괜찮고, 사진은 안 된다는 건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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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은 흡연이라는 사적 행위가 공공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법적 규율과 예술적 표현 사이의 충돌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 세기 전 무하가 그린 유려한 연기의 곡선도, 이제는 검열과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은 여전히 담배 연기를 그리지만, 사회는 더 이상 그 연기를 관대하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논란이 된 레이 돌의 작품 (1970) / 사진=필자 제공
논란이 된 레이 돌의 작품 (1970) / 사진=필자 제공
문제 된 것은 호크니의 포스터만이 아니었다. 2024년,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레이던 대학교에서도 회의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한 점의 유화를 둘러싸고 비슷한 논란이 대두되었다. 네덜란드 화가 레인 돌이 1970년대에 그린 이 작품은, 당시 대학 이사회 구성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가를 피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백발의 남성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 느긋한 자세로 모여 서류를 높이 쌓아두고 회의 도중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한 이 장면은 과거에는 나이 든 남자 교수들의 ‘권위’와 ‘신사다움’을 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흡연 미화와 가부장적 질서의 재현처럼 읽힌다. 그리하여 회의실을 자주 사용하는 젊은이들은 그림의 제거를 요청했고, 2024년 11월, 직원들이 그림을 벽에서 떼어 뒤집어 세우는 장면이 SNS에 공유되며 논란은 본격화되었다. 레이던대 로스쿨 교수 요아너 판 데르 뢴은 SNS에 “오늘,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고 게시했다.

이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해당 그림이 본래 광고도 아니었고, 선동적 메시지를 가진 것도 아니며, 그저 한 시대의 대학 문화와 초상적 풍경을 기록한 회화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문화가 다양해지고 감각이 바뀌자, 담배를 피우는 이미지는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장면은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흡연은 이제 단지 기호가 아니라, 사회적 기억과 감정, 권위와 젠더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이미지가 되었다.

담배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미지의 배신>이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사실적으로 그려놓고 이렇게 선언한다.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선언은 이미지가 결코 실재 그 자체가 아니며, ‘본다’는 행위는 시각 그 이상으로 해석의 과정임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 파이프는 연기를 내뿜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파이프의 이미지’이며, 우리가 거는 의미만이 존재하는 상징일 뿐이다.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신>, 1929, 캔버스에 유채, 81x60cm / 그림. © Museum Associates/LACMA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신>, 1929, 캔버스에 유채, 81x60cm / 그림. © Museum Associates/LACMA
그렇다면 레인 돌의 회화는 어떤가? 그것은 실제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성들의 그림이다. 하지만 그들이 피우고 있는 것은 진짜 담배인가? 그 장면은 지금도 살아 있는 현실인가, 아니면 한 시대의 초상(肖像)에 불과한가? 우리가 제거한 것은 담배인가? 아니면 어떤 시대의 질서, 권위, 추억, 불편한 기억인가? 이미지는 언제부터 해악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해악은 실제로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마그리트는 말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우리는 묻는다. “이것은 담배가 맞는가?”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지는 실재의 배신이며, 해석의 열쇠는 늘 보는 이의 손에 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담배와 함께 그려 넣은 예술가들은 어떤 진실을 말하려 했던 걸까?
뭉크 <담배를 든 자화상>, 1895, 캔버스에 유채, 110.5 x 85.5cm / 그림. © 노르웨이 국립미술관/Børre Høstland
뭉크 <담배를 든 자화상>, 1895, 캔버스에 유채, 110.5 x 85.5cm / 그림. © 노르웨이 국립미술관/Børre Høstland
1895년, 에드바르 뭉크는 자화상을 그렸다.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 얼굴. 피부는 창백하고, 몸은 녹아내릴 듯 비틀려 있다. 그림의 제목은 단순히 <담배를 든 자화상>. 미술사학자 패트리샤 버먼은 이 그림을 두고, “19세기 말 사회적 건강 규범에 대한 도전”이라며, “계급과 성별의 경계 사이에서 흡연은 일탈이며 자기 해체의 기호”라고 평했다. 뭉크에게 담배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파괴되어 가는 자아를 담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반 고흐, <담배피는 해골>, 1885년,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소장 / 그림. © Van Gogh Museum, Amsterdam
반 고흐, <담배피는 해골>, 1885년,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소장 / 그림. © Van Gogh Museum, Amsterdam
그리고 또 한 사람.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젊은 시절, 한 해골이 담배를 문 채,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림을 남겼다. 제목은, 〈담배피는 해골〉. 이 이미지는 마치 오늘날의 가장 강력한 금연 포스터처럼 느껴진다. 생과 사, 욕망과 파멸, 유머와 허무가 함께 스며든 그림. 고흐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연기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사라진다는 예고라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는 그림은 단지 흡연의 장면인가? 아니면 존재의 흔들림과 연기의 초상인가?

뭉크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웠고, 고흐는 해골에 담배를 물렸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이 이제는 공공의 장소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담배갑의 경고 문구와 징벌의 이미지이다.

한국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 가입한 뒤, 「국민건강증진법」 제9조의2를 통해 방송, 인쇄물, 인터넷, 영화 등 모든 매체에서 담배 광고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였다. 또한 제9조의4에 따라 담뱃갑의 앞뒷면 절반 이상에 경고 그림과 문구를 의무적으로 부착하게 되었으며, 이는 예술적 로고, 컬러마케팅, 시각적 브랜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치다. 한편, 「청소년보호법」 제27조는 흡연 장면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영상물이나 간행물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영화, 드라마, 웹툰 속 흡연 이미지 역시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담배 이미지를 광고에서 볼 수 없고, 예술이 흡연을 그릴 자유는 공공성과 보건이라는 이름으로 검열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자리를 채운 금연 포스터들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감성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있다. 공포와 혐오를 넘어, 공감과 스토리텔링으로 접근하는 시각적 언어가 나오고 있다. 이제 담배는 보이지 않지만, 그 담배를 둘러싼 감정, 관계, 죽음과 삶의 상징들은 더욱 시각적으로 선명해졌다.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었지.” 그 말은 현실에서 멀어진 오래전의 시간, 사라진 질서와 그리운 유머, 그리고 어딘가 막연한 자유의 기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실제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묘사한 민화의 현대적 변형이 존재한다. 가령, 김혜경 작가의 <담배 피우는 호랑이>는 전통 민화 양식을 차용하면서도 현대인의 시선으로 흡연이라는 행위를 익살스럽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민중의 삶 속에서 담배는 귀함이나 해로움이 아닌, 하루의 끝에 한 줌쯤 허락된 여유였으며, 민화는 그 여유를 해학과 상상으로 풀어냈다. 민화 속 호랑이는 익살스럽고 천진하며, 인간처럼 앉아 연기를 즐긴다.
김혜경 <담배 피우는 호랑이> / 사진=필자 제공
김혜경 <담배 피우는 호랑이> / 사진=필자 제공
오늘날 담배는 법으로 금지되고, 흡연의 이미지는 시각문화에서 점점 지워져간다. 그러나 그 연기를 그렸던 예술가들의 손끝과 그 연기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무언가’를 피워내고 있다. 그것이 담배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자유였을까? 욕망이었을까? 혹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허용된 일탈이었을까. 이제 우리는 다시 말할 수 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예술은 무엇을 피우고 있었는가.”

김현진 법학자•인하대 로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