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를 돌리고 읽다가 빨래를 못 널 뻔했다. 호들갑스러운 말이지만 이 책 때문에 한동안은 초원을 살았다. 하루 종일 일에 종종거리다가도 밤이 되면 책장을 열고 푸른 잉어가 펄떡이는 세계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은 자각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꿈의 장벽이 얇아지고 있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소설 속 영해의 대사다. 판타지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 무서운 힘이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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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만 잘 쓸 것 같지만 귀신 이야기도 잘 쓰고 판타지도 잘 쓰는 사람이 배명훈이다. 뭐든 잘 쓸 수 있다는 건 재능만의 문제가 아닌데,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면서 창작을 이어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한 권의 소설을 쓸 때마다 논문을 쓸 수 있을 만큼 그 분야를 파고든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평생 공부해야 할 줄 알았으면 대학원에 남을 걸 그랬다"라고 푸념했다지만, 그만큼 엄격한 자기 기준과 창작을 향한 집념이 지금의 소설가 배명훈을 만들었을 것이다.

배명훈 작가와 만난 것은 딱 10년 전 여름이었다. 『첫숨』 작업을 시작으로 그 뒤에도 함께 일할 기회를 종종 얻을 수 있었는데 늘 즐겁고 또한 긴장되는 날들로 기억된다. 문장을 다듬고 이야기의 속도에 의견을 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관 자체의 엄밀성을 기해야 하는 확인 작업이 필요한데, 그의 작품을 편집할 때면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거나 데이터베이스에서 논문을 받아서 크로스체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웹사이트를 헤매고 세계를 직접 그림으로 그려보며 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곤 했다. 이미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공부한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와 함께 확인 작업을 거쳐 책을 내야 훨씬 든든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할 텐데, 실수도 많고 덤벙거리는 나로서는 그런 든든한 편집자가 되기에는 구멍이 너무 많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치밀하게 쌓은 세계를 가장 첫 독자로 유영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늘 기쁘고 벅찼다.
소설 <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북하우스, 2025 / 사진. © KYOBO BOOK CENTRE
소설 <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북하우스, 2025 / 사진. © KYOBO BOOK CENTRE
윤해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고, 뚫어지지 않겠노라 스스로 단단해졌다. 술름인들에게 그것은 마법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마목인들의 눈에는 오래오래 구전될 전설의 한 대목으로 보였다. (p. 127)

다시, 『기병과 마법사』로 돌아가자면, 지난 20년간 SF작가로 이름을 날린 배명훈이지만 그의 작품적 특장이 잘 드러나는 판타지 장편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비범한 혈통과 유년의 고난에서 시작해 초월적 힘의 개입과 각성, 고난을 이기고 민중을 구제하는 기본적인 동양적 영웅담 플롯에 전쟁과 전략에 있어 탁월함을 보여주는 배명훈 특유의 이야기 구성 능력이 더해졌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전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치밀하고 치열했다. 더하여 거대한 곰개와 상서로운 잉어, 세계를 뒤덮는 봉황까지 동양 고유의 신화적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등장해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원본’인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관을 선보인다. 판타지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먼 환상 공간을 보여주면서도 그 구체성과 완결성으로 완벽한 몰입과 해방감을 전하는데, 그 강력한 힘이 380페이지에 가까운 긴 분량 내내 자유자재로 발휘된다는 것 자체가 마법 같았다고도 느꼈다.

더하여 읽는 이가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는 영윤해와 달낙현이라는 인물. 이들은 과장된 몸짓 없이도, 달콤한 언약 없이도,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 나도 읽는 내내 그들을 그렇게 믿고 사랑했다. 그렇게 배명훈의 소설은 단 한 편도 배반하지 않고 소설의 즐거움을 가득 안겨주었다.

최지인 문학 편집자•래빗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