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도시'로 불리는 부산. 그런데 가을에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보다 먼저, 부산국제연극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 초여름이면, 전 세계 10여개 국에서 배우와 연출가를 비롯한 극단들이 부산을 찾습니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부산국제연극제는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한 이탈리아 연극 '채식주의자(La vegetariana)'가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더 큰 관심을 받았는데요.
연극 '채식주의자'를 연출한 이탈리아 배우 겸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사진=허세민 기자
연극 '채식주의자'를 연출한 이탈리아 배우 겸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사진=허세민 기자
이 작품은 이탈리아 극단 INDEX의 연출가 겸 배우인 다리아 데플로리안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 기획한 것입니다. 작년 10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첫 공연을 한 뒤 유럽 여러 도시를 거쳐 이번에 처음 한국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관람 이튿날인 지난 1일, 부산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데플로리안을 만났습니다.

▷'채식주의자'의 한국 초연입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아요.
"한국에서 '채식주의자' 공연을 하는 건 제 오랜 꿈이었어요. 막연한 꿈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니 정말 기쁩니다. 영혜가 소설 속에서 자주 언급했던 '꿈'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이 와닿는 순간이에요."

▷이번 공연에 한강 작가도 초대했나요?
"(안타깝게도) 공연 기간에 한강 작가가 한국에 없어 오지 못한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년 말에는 제가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스톡홀름에 찾아가 한강 작가를 잠깐 만난 적이 있어요. 한강은 여러 나라에서 <채식주의자>를 무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고, 이건 (저에 대한) 큰 신뢰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주로 어떤 종류의 작품을 맡았나요?
"전 문학 작품에 관심이 많아요. 무대 공연을 위해 쓰인 희곡으로 연극을 만드는 게 아니라, 주로 소설이나 시 등 문학 작품에서 끌어와 연극을 창작하고 있어요. 연출가이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배우로 시작했고,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극 '채식주의자'를 연출한 이탈리아 배우 겸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사진=허세민 기자
연극 '채식주의자'를 연출한 이탈리아 배우 겸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사진=허세민 기자
▷소설 <채식주의자>는 어떤 계기로 처음 접하게 됐나요?
"2018년에 이탈리아 유명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에서 영감을 받은 공연을 기획 중이었어요. 주인공인 아내가 우울한 내면 연기를 해야했죠. 한 친구가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제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추천해줬어요."

▷책을 읽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정말 신비로운(mysterious) 책이었어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혜의 이야기가 주변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이게 강렬하면서도 연극적으로 다가왔어요. 폭력에 대한 해법이 '식물이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귀결된다는 것도 환상적인(fantastic)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요. 현실주의(realism)만으로는 현실(reality)을 다 담아낼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엮어낸 소설의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작에 문학적 표현이나 폭력적 장면이 많아 연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길어요.(웃음) 한강 작품은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이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자주 뒤바뀌기 때문에 무대화가 어려웠어요. 버릴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을 만큼 다 좋아서 (연극용으로) 내용을 줄이는 것도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가위손'으로 유명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원작을 열 장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 속 한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히 기울이신 노력이 있으신가요?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은 게 <채식주의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 개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됐죠. 이탈리아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보기도 했어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시' 등 한국 영화를 보면서 신문지를 바닥에 어떻게 펼치는지 등 한국식 동작을 디테일하게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연극은 원작에 비해 '순한 맛'으로 표현됐습니다. 영혜 아버지가 영혜 입에 고기를 욱여넣거나, 형부와의 성관계 장면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말'의 힘을 믿어요. 무대 위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아도, 말에 담긴 폭력은 충분히 느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원작에선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한테 뺨을 맞습니다. 연극에선 영혜 남편과 언니, 형부가 스스로 뺨을 때리는 장면으로 대체되는데, 어떤 연출 의도가 있나요?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 때 스스로 뺨을 때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는 세 인물이 영혜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 죄책감을 갖길 바랐어요. 남편뿐 아니라 형부 역시 영혜를 성적인 도구로 삼아요. 언니인 인혜는 동생을 사랑하긴 하지만, 진심으로 영혜를 위한다기보다 결국 자신이 편해지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영혜 몸에 꽃을 그려넣는 표현 방식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 장면은 해결책을 찾는 데 정말 어려움이 많았어요. 연극은 영화와 달라서, 몸에 실제로 꽃을 그리면 지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 시도 끝에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오버헤드 프로젝터(OHP)를 사용하기로 했어요. 예전에 학교에서 많이 썼던 기기죠. OHP 투명필름 위에 붓칠을 하면 빛에 의해 반사된 그림이 영혜의 몸 위에 그려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원리입니다."

▷공연 내내 무거운 공기가 흐르다가 어느 순간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장면이었어요.
"맞아요. 원작에는 없지만 새로 추가한 장면이에요.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려고 애국가를 삽입하기로 했죠. 영혜 남편 역을 맡은 가브리엘레 포르토게세의 아이디어였어요."

▷영혜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이탈리아 여성들 역시 크고 작은 일상 속 폭력을 경험해왔습니다. 그래서 영혜 역을 맡은 모니카 피세두를 통해 이런 폭력을 이제 멈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문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열린 자세로 대응하는 태도를 갖도록 연기를 이끌었죠."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주인공 영혜의 친언니 역을 맡은 연출가 겸 배우 다리아 데플로리안./© Andrea Pizzalis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동명 연극의 한 장면. 주인공 영혜의 친언니 역을 맡은 연출가 겸 배우 다리아 데플로리안./© Andrea Pizzalis
▷직접 연기한 인혜(영혜의 언니) 역은 어땠나요?
"인혜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인혜는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거든요. 늘 좋은 아내, 좋은 언니, 좋은 딸이 되는 게 1순위였죠. 저 역시 그런 삶의 방식을 끊어내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라 인혜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공연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
"'채식주의자'는 올 7월 그리스 아테네, 10월 스페인 마드리드, 내년 1월 스위스 로잔에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다시 공연할 수 있었으면 해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연극으로 각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어요. 연극제가 끝나면 준비 작업을 위해 제주도를 방문할 계획입니다."

부산=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