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베를린 피에르 불레즈 잘(Pierre Boulez Saal)
키릴 게르스타인 피아노 리사이틀
불레즈 잘, 음악과 진지한 사유가 만나는 공간
불레즈 잘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故 에드워드 사이드의 공동 비전에서 출발한 '바렌보임-사이드 재단'의 프로젝트로 탄생한 독특한 공연장이다. 이 공간은 단순한 연주 홀을 넘어, 음악과 철학, 예술과 사회가 교차하는 대화의 장으로 설계되었다.
2017년 베를린에 개관한 불레즈 잘은 타원형 구조로 설계되어 연주자와 청중이 물리적, 감성적으로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며, 청중 역시 공연의 일체감 속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이름 그대로 현대 음악의 거장 피에르 불레즈에게 헌정된 이 공간은 오늘날 클래식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 공간이자, 바렌보임이 추구해 온 인문학적 예술 실천의 이상이 구현된 장소이다. 건축 설계를 맡은 프랑크 게리와 음향 설계를 맡은 야수히사 도요타가 이러한 바렌보임의 뜻을 함께해 무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불레즈 잘 공연장 / 사진. ⓒMonikaRittershaus, 제공. 불레즈 잘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피아니스트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은 그의 닉네임에 걸맞게 다양한 레퍼토리와 세계 각국의 무대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음악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전통적 고전음악부터 현대 작곡가들의 난해한 신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도전적이며 고유한 철학이 묻어난다.
번스타인의 '불안의 시대', 부조니 피아노 협주곡,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 원전 에디션, 영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 피아노 협주곡 등, 게르스타인의 최근 연주 이력이 그의 도전적 행보를 잘 설명한다. 그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다른 아티스트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영역을 두루 섭렵하면서, 최근에는 아르메니아 작곡가 코미타스의 작품을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뷔시가 작곡한 작품과 함께 조명하여 또 한 번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의미가 담긴 앨범을 출시함으로써, 본인의 확고한 예술적 철학을 고수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번 베를린 리사이틀의 프로그램에 담긴 서정성과 사유적 깊이는 예술가로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었다. 바람결에 꽃향기가 흩날리는 봄에 열린 그의 리사이틀은 “꽃”과 “왈츠”라는 중심 테마를 따라 시간과 장르, 국경을 넘나드는 시적인 여정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리사이틀이 아닌, 슈타인웨이 건반을 통해 피어난 한 편의 서정시이자, 내면과 외면을 교차하는 음악적 사유의 공간으로 청중에게 다가왔다.
사랑과 봄의 서정, 피아노로 피어난 ‘꽃’
리사이틀은 로베르트 슈만의 <꽃의 노래(Blumenstück Op. 19)>로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짧고 아기자기한 살롱 음악처럼 느껴지지만, 이 곡은 슈만이 클라라에게 보낸 숨은 연서이자,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꽃의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이다. 게르스타인의 손끝에서 들려온 음색은 마치 꽃잎이 하나하나 피어나는 듯했다. 둥글고 따스하며, 가끔은 속삭이듯 연주된 피아노 소리는 불레즈 잘의 음향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어지는 토마스 아데스의 짧은 왈츠 <Az ág>는 헝가리어로 ‘가지’라는 뜻을 지닌다. 그 짧은 곡 안에 얼마나 많은 사유와 정서가 담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슈만의 서정성이 게르스타인의 현대적 감각으로 부드럽게 살아났다. 수많은 음이 마치 흔들리는 가지 끝에 피어나는 작은 꽃처럼 느껴졌고, 연약하지만 생명력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슈만의 <사육제(카니발)>에서는 다시 한번 게르스타인의 예술적 정수가 드러났다. 이 곡은 슈만이 상상한 <다비드 동맹>의 세계가 무대로 펼쳐지는, 피아노로 구현한 교향시이다. 에우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Eusebius & Florestan), 두 상반된 슈만의 내면적 자아가 교차하며 삶과 사랑, 이상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게르스타인의 해석은 섬세하면서도 유기적이었고, 루바토의 자유로움 속에서도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 건축적인 구조감이 살아 있었다. 그의 연주는 빛과 그림자, 수직과 수평, 질감과 공간의 교차 속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흘러갔다.
사진. ⓒ박마린꽃의 향기에서 문명의 왈츠까지 – 연주의 절정
전반부에서 꽃과 왈츠의 시적 이미지가 조용히 피어났다면, 후반부는 그 정서가 응축되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쿠르탁의 <Virág az ember…> 연작은 아데스의 곡과 마찬가지로 슈만의 정신적 유산을 잇는 작품들로, 인간 존재 자체가 꽃이라는 상징으로 드러난다. 작고 내밀한 울림 속에 인간의 연약함과 숭고함이 공존한다. 침묵과 여백마저 음악적 울림으로 승화시키던 게르스타인의 연주에 관객은 일제히 몰입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라일락(Lilacs)> 역시 프로그램의 큰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어졌다. 탁월한 멜로디 창조자였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90년 학창 시절부터 러시아 혁명을 피하여 서방으로 망명하기 전 1916년까지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러시아를 떠난 후 그의 언어적 뿌리에서 멀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가곡을 쓰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는 망명 전, 시인 예카테리나 베케토바(Ekaterina Beketova)의 시를 바탕으로 라일락의 향기와 멜랑콜리를 담아냈다. 중심부의 어두운 분위기는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던 작곡가의 마음을 암시하는데, 게르스타인의 연주는 그 모든 감정을 절제 속에서 전달했다. 관객은 작품에 온전히 몰입되어 숨을 죽였고, 홀 안은 적막이 흘렀다.
불레즈 잘 공연장 / 사진. ⓒMonikaRittershaus, 제공. 불레즈 잘
퍼시 그레인저(Percy Grainger, 1882–1961)의 <꽃의 왈츠>는 리스트 풍의 패러프레이즈로 무대와 객석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차이코프스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친숙한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이 편곡은 극단적인 기교가 특징이다. 게르스타인은 이 곡에서 특유의 타건과 페달링으로, 순수한 꽃의 이미지에서 문명의 향연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유려하게 끌어내었다.
프란시스코 콜(Francisco Coll, 1985- )의 <Two Waltzes Toward Civilization>은 현대적인 왈츠로 루르카의 ‘뉴욕의 시인’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불안과 격정, 문명의 혼란과 인간의 존재가 얽힌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예측 불허의 긴장 속에서도 왈츠라는 고전적 장르를 통해 문명과 야만, 전통과 현대의 교차점을 형성한다.
라벨의 <라 발스(La Valse)>는 지금까지 연주된 작품의 흐름에 정점을 찍는다. 겉으로는 우아한 빈 왈츠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속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돈, 퇴폐, 그리고 광기가 숨어 있다. 게르스타인의 해석은 단순한 기교를 넘어, 라벨이 의도한 20세기 문명의 위태로움에 관한 서사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무대 위에서 춤추는 ‘문명의 꽃’은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웠고, 관객은 <라 발스>의 진정한 본질을 엿보았다.
연주를 완성하는 존재는 ‘청중’
이날의 리사이틀은 단순히 게르스타인의 독무대가 아니었다. 무대의 아티스트와 최단 거리에서 감상하던 불레즈 잘의 관객은 음악회가 단지 ‘수동적으로 듣는’ 행위가 아닌, ‘함께 참여하는 의식’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세대와 배경을 넘어선 진지한 그들은 숨죽이며 게르스타인의 손끝을 따라갔고, 때로는 그와 함께 공명하고 적극적으로 전율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음악을 함께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