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이니셔티브’를 계기로 내일 도쿄에서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은 두 나라 미래는 물론이고 동북아 및 세계질서를 가름할 중대 분수령이다. 이번 정상 회동은 직접 방문 외교로만 치면 무려 12년 만이다. 망가진 관계 복원을 넘어 경제와 안보가 같이 가는 뉴노멀에 적합한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이라는 시대적 소임이 두 정상 앞에 놓여 있다.

양국 간 경제 협력은 2018년 징용 배상 판결 이후 급전직하했다. 2019~2021년 한국의 중국 미국 유럽연합(EU) 교역은 모두 늘었지만 대일 교역만 3% 줄었다. 동북아를 중심으로 반도체 등 첨단 제품의 공급망 재편이 급물살을 타는 와중의 역주행이다. 13개국이 참여해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의 협력도 시급하다. 안보 측면에서의 변화는 더 급박하다. 북핵 위협이 임계점을 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속에 미국 일본 인도 호주 중심의 새 안보질서 쿼드(Quad)도 출범했다.

윤 대통령이 일본의 확답에 의존하지 않고 ‘제3자 변제’ 방식 해법을 결단한 것은 이런 흐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문희상 국회의장 시절 거의 비슷한 방식을 제안한 데서 보듯 제3자 변제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유족들 사이에서 “윤 대통령 뜻에 공감한다”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일본이 한국의 이런 성의를 혹여 항복의 뜻으로 오해한다면 최악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 말처럼 빈 잔에 절반의 물이 채워졌을 뿐이며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일본의 몫이다. 반 컵 채우기의 핵심은 물론 한국민이 바라는 반성과 사죄다. 정상회담에 임하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징용 피해자 유족들은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요청했고, 일본 정치권에서도 “마음이 전해지는 발언”(제1야당 간사장)을 주문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진단대로 이번 해결책이 좌절되면 북한 중국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는 민주주의 국가의 발밑이 흔들린다. 악화한 한·일 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세력도 두 나라에 건재하다. 기시다 총리는 작은 국내 정치적 이해를 접고 진솔한 마음으로 대의를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