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과의 활발한 교류만큼 이재명 정부가 기존 진보 정부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없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 땐 청와대 참모가 부처 장관의 기업 방문을 비판했던 일도 있다. 2018년 8월 김동연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혁신 성장 점검’ 명분으로 현대자동차, SK, LG그룹에 이어 삼성전자를 방문하려 하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재벌에게 투자·고용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의 우려를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소동이 일었다. 일부 대기업에 투자·고용을 의존하면 재벌 개혁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는 당시 주류 진보 좌파 진영의 시각이다.반면 현 정부는 장관을 넘어 대통령, 여당까지 기업인과 활발히 만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빠르게 취임 후 열흘 만에 재계 총수를 만나 정부와 기업의 ‘원팀 정신’을 강조했다. 6개월여 만에 크고 작은 행사에서 열 번 넘게 총수들을 만났다. 더불어민주당도 원내대표,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 소속 의원이 법 개정 의견 수렴 명목 등으로 수시로 경제인·경제단체와 간담회를 열었다.기업의 반대에도 여당이 노란봉투법, 상법을 강행 통과시킨 것처럼 이런 만남이 ‘요식 행위’에 머문 때도 있지만 몇몇 분야는 큰 성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최대 난제였던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무난히 타결한 게 대표적이다.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요구를 먼저 파악하고 조선사 등 기업은 감당 가능한 ‘투자 보따리’를 협상 카드로 제시해 시너지를 냈다. 이 대통령이 관세협상 타결 직후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이 이렇게 합이 잘 맞아 공
지난주 후반 글로벌 고용 컨설팅 기업 챌린저그레이앤드크리스마스(CG&C)가 ‘10월 감원 발표 보고서’를 공개해 글로벌 증시에 충격을 줬다. 지난달 미국 기업 감원이 전달보다 183% 급증하고 10월 기준으로는 2003년 후 최대인 15만3074명에 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올해 1~10월 누적 감원은 109만9500명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 이후 가장 많았다. 고용 쇼크까지 겹치며 미국 경기 침체 우려가 커졌고 뉴욕 및 한국 증시가 급락했다. 보고서 원문을 읽어보면 감원의 절대 규모 못지않게 충격적인 대목이 또 있다. 미국 기업이 지난달 감원 사유로 1위 ‘비용 절감’(5만400명)에 이어 ‘인공지능’(AI·3만1000명)을 2위로 꼽은 것이다. AI는 이 회사 보고서에서 2023년 5월(3900명) 감원 사유 항목으로 처음 등장한 데 이어 지난 7월(1만 명)엔 5위권으로 진입하더니 급기야 지난달 2위가 됐다. 경기 악화, 구조조정, 인수합병(M&A), 폐업 등 ‘전통적 사유’를 따돌리고 AI가 핵심 감원 사유가 된 것이다.AI가 확산 초기 단계부터 미국 고용시장 지형을 바꾸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테크 분야를 넘어 데이터 분석, 콘텐츠 제작, 고객 응대 분야 화이트칼라에까지 AI 기반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AI의 노동 대체 현상’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유로운 해고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의 강한 고용 유연성은 이런 AI 혁신을 한층 가속화하고 있음을 이번 CG&C 보고서는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노동시장의 구조적 악화로 이어질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경영, 엔지니어, 전문직 등 ‘비반복적 인지 노동 직군’을 중심으로 앞으로 상당
집권 초기 기준으로 이재명 정부는 같은 진보 정부로 평가받는 문재인 정부보다 더 강한 확장재정을 짰다. 나중에 코로나19 발발이란 돌발변수로 재정 투입을 더 늘렸지만 집권 첫해 문 정부는 이듬해 본예산을 전년 대비 7.1% 늘렸다. 이재명 정부는 내년 본예산을 이보다 1%포인트 높은 8.1% 증액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5년간 문 정부는 연 1.6~2.1%로 제한하려 했지만 이 정부는 연 4.0~4.4%로 잡아뒀다. 법제화는 안 됐지만 문 정부 때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도입을 추진했던 재정준칙인 ‘적자비율 3% 이내’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결과 내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1.6%로 50%를 처음 넘어서고 2029년엔 58.0%까지 치솟을 전망이다.건전재정론자들과 야당에서 재정 중독이 우려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현 정부가 확장재정에 나선 이유는 주지하는 바다. 경기 부양과 소득 재분배 외에도 ‘진짜 성장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재정을 쓰기로 한 결과다. 배경은 이른바 이재명 대통령의 ‘씨앗론’이다. 국가 주도 기술 투자로 인공지능(AI) 3대 강국으로 도약해 잠재성장률을 3%로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문 정부 때도 ‘혁신성장’을 예산 편성의 양대 목표 중 하나로 내세웠지만 실제론 분배 중심의 ‘소득주도성장’에 재정을 집중했던 것과는 분명 다르다.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공저자로 참여해 쓴 <잘사니즘: 포용적 혁신 성장>에서 확장재정으로도 재정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재정 적자 10조원이 벤처창업에 활용돼 100조원의 이익이 나면 분모인 GDP가 부채보다 늘어 국가채무비율이 줄
“허점이 너무 많은 법입니다.”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사모펀드(PEF) 대표는 새 정부 출범 후 더불어민주당이 두 차례에 걸쳐 강행 처리한 상법 개정안을 이렇게 평가했다. 회사 직원과 국내 대형 로펌을 찾아가 개정 상법 해설을 듣고 내린 결론이다. 그는 “로펌조차 결국 법원 판결에 달렸다며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상당했다”고 했다.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집중투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독한 내용’에 관심이 집중돼 거의 부각되지 않았지만 최근 개정 상법은 ‘부실한 법 형식과 체계’도 큰 문제다. 과거 모든 주요 상법 개정은 개정 때마다 법무부가 주도해 전문가 특별위원회를 꾸리고 심도 있는 토론과 기초연구를 거쳐 초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 개정은 탄핵과 조기 대선 국면에서 다수의 민주당 국회의원이 만든 의원 안만으로 이뤄졌고, 1500만 동학개미 표심을 겨냥한 ‘코스피지수 5000’ 공약 이행을 위해 이마저 속도전으로 처리됐다. 그러다 보니 “용어가 부정확하고 다른 조문·법령과의 관계, 실무적 역효과 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법안”(천경훈 서울대 교수)이 됐고, 법 개정 이후에도 법 해석이 충돌하며 기업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조항(382조의 3)부터 그렇다. 1항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회사 외에 ‘주주’를 추가하고 2항을 신설해 이사는 ‘총주주’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도록 규정했지만 용어 정의를 하지 않았다. 주주, 총주주, 전체 주주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 법조계는 문맥 등을 살펴 주주와 총주주는 ‘전체 주주 집단&rsqu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 2기 핵심 경제·사회 정책을 한데 모아 지난달 법제화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은 세부 내용을 살펴볼수록 그의 제조업 육성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한편에서 각국에 관세를 때리며 ‘미국 밖 기업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트럼프는 다른 한편에선 OBBBA를 통해 ‘미국 내 기업들’에 법인세를 대폭 감면하기로 했다. 타국 제조업체까지 미국 땅에 공장을 짓게 유도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다. OBBBA는 적자가 나 납부할 법인세가 없는 기업도 투자액의 일정 부분을 무조건 환급해 주는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기존 25%에서 35%로 높였다.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도 상당 기간 유지해 배터리 부품, 희소 금속 등의 미국 내 공급망 재구축을 지원한다.미국 내 사업용 자산 및 연구개발비에 대한 ‘즉시 상각(full expensing)’을 영구 허용한 것은 더 인상적이다. 투자 연도에 곧바로 전액을 세무상 비용(손금)으로 떨어내도록 허용한 것으로,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가 통상 4~5년, 길게는 10년에 걸쳐 조금씩 비용처리(감가상각)하게 하는 것과 대비된다. 투자 초기 과세표준과 납부세액을 대폭 줄이고 잉여현금을 늘리게 해 투자수익률(IRR)을 높이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외신에선 알파벳(175억달러), 아마존(157억달러) 등 S&P500 기업 369곳이 올해만 총 1480억달러의 법인세를 절감할 것이란 보도가 나온다. 반도체는 물론이고 조선, 자동차, 발전, 인프라 등 자본투자가 많은 한국 기업들도 앞으로 미국에 신규 투자 때 대규모 세제 혜택을 받는다.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2015년 6월 9일 기획재정부 미래경제전략국은 ‘범(汎)정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일일 점검회의’를 준비하는 주무 부서가 된다. 전달 20일 첫 발생 때 질병관리본부장이 맡았던 ‘메르스 방역 컨트롤타워’가 보건복지부의 장옥주 차관, 문형표 장관을 거쳐 결국 당시 총리 대행을 맡고 있던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으로 격상되면서다. 방역망이 뚫리며 환자가 속출하자 발 빠른 인사·예산권 행사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다. 미래경제전략국은 2012년 저출생·고령화, 신성장동력 확보 등 국가 중장기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신설된 조직이다. 당시 기재부 한 간부는 “미래경제전략이란 타이틀은 달고 있지만 전염병이 창궐하자 일손이 남는다는 이유로 ‘단기 현안 대응 부서’로 돌아간 것”이라며 “국가 장기 전략을 총괄하는 기재부의 현주소”라고 말했다.정부조직법은 기재부 장관 업무로 ‘중장기 국가발전전략 수립’을 가장 먼저 나열한다. 기재부가 미래경제전략국을 장기전략국, 경제구조개혁국 등으로 바꿔가며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메르스 대응 이후에도 기재부는 장기 과제 해결보다 코로나 등 위기 대응, 금융·외환시장 안정, 추가경정예산 등 단기 경기 부양과 생활물가 잡기 등 현안 처리에 집중했다. 물론 기재부만의 잘못이라기보다 매 정권이 그걸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한국 출생률은 세계 꼴찌 수준으로 떨어졌고, 노동 등 구조개혁은 방치됐으며, 잠재성장률은 5년마다 1%포인트씩 떨어졌다. 1970년대 삼성 현대 등을 키운 장기 산업정책도 실종돼 지난 10여 년간 새로운 성장동
대통령제 국가에서 신임 대통령이 내리는 ‘1호 업무 지시’는 그 자체로 상징성이 크다.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문제에 집중하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지를 국민과 행정부에 제시하기 때문이다.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첫날인 지난 4일 1호 행정명령으로 ‘비상경제 점검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지시했다. 취임사에서 ‘불황과의 일전’을 선언한 뒤 나온 후속 조치다. 민생 회복과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저녁 전 정부에서 임명된 경제 부처 관료들을 불러 첫 비상경제 점검 TF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개인 전화번호를 관료들에게 알려주며 정책 제안을 직접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이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경제 살리기와 민생 회복을 위해 ‘속도전’에 나선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한국 경제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전 분기 대비 역성장(-0.2%)했다. 민간 소비, 건설투자, 설비투자 등이 일제히 감소해 내수 전반이 위축되고, 통상 전쟁으로 수출도 줄었다. 한국은행은 올해 연간 성장률이 0.8%에 머물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 경제가 연간 마이너스나 0%대 성장률을 나타낸 것은 오일쇼크,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사태 등 1960년 이후 네 차례에 불과하다. 새 정부가 비상경제 점검 TF 구성 후 성장률을 일정 수준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서두르는 이유다. 정부는 최소 20조원에서 많게는 30조원 이상을 고려하고 있다.경기 불황기에 재정을 풀어 경제에 숨통을 틔워줘야 한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노동시장 관련 제도는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크게 바뀌었다. 일자리 감소 등 부작용이 불 보듯 뻔해도 유권자 표심을 쫓는 정치권은 ‘선거판 경품’처럼 대선 공약을 만들고 결국 입법화해 노동시장이 충격받는 일이 되풀이됐다. 반도체 등 국내 기업의 경쟁력 약화 요인으로 꼽히는 주 52시간 근무제부터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으로 지금처럼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과 함께 대선 슬로건으로 등장해 입법화됐다. 2017년 1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근로시간 단축으로 50만 개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세운 데 이어 3월 대선 국면이 본격화하자 민주당 자유한국당 등 원내 교섭단체 4당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에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기로 전격 합의하면서 논의에 불이 붙었다. 중소기업의 거센 반발 등으로 얼마간 늦춰졌지만 이듬해 2월 입법이 완료됐다. 적용 예외 업종을 대폭 감축한 상태에서 유예기간 없이 5개월 뒤부터 바로 시행하는 ‘경착륙 방식’이었다.법정 정년이 60세로 연장된 과정도 비슷하다.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2012년 베이비붐 세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야 공약으로 등장해 이듬해 4월 일사천리로 입법화됐다. 노동계 뜻대로 정년 연장은 2016년 시행이 강제되고 그에 필수적으로 수반돼야 하는 임금체계 개편은 권고 규정으로 놔둔 부실 입법이었다.일련의 ‘대선발 표(票)퓰리즘’이 초래한 결과는 주지하는 바다. 상위 15%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만 정년 연장과 단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께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와 경영계는 당시 막 출간된 책 한 권을 주목했다.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변양균 씨가 쓴 <경제철학의 전환>이다. 대선 경제공약 수립 단계에 깊숙이 관여한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숨은 설계자’로 불렸고 당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의 추천으로 발탁된 터라 책 내용이 대거 정책에 반영될 것이란 기대가 컸다.책의 주장은 지금 봐도 꽤 설득력이 있다. 과감한 구조개혁을 통한 ‘슘페터식 공급 혁신’과 사회안전망 확충을 패키지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기업가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결합과 창조적 파괴를 할 수 있도록 해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 성장률 제고를 이끌게 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날 일시적 실업 등 사회 비용은 안전망 확충으로 해결하면 장기적 포용 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책은 한편으로 정규직 해고 허용 및 고용 형태 다양화, 파견 허용 업종 확대, 비정규직 활성화, 수도권 규제 완화, 금융규제의 네거티브화 등 공급 혁신 구조개혁을, 다른 한편으로 실업급여 및 공공임대주택 확대, 아동수당 도입, 반값등록금 등 기본적 삶 보장 방안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이 가계소득을 늘리는 ‘소득주도성장’과 기업 혁신을 유도하는 ‘혁신성장’을 양대축으로 삼은 것은 외견상 책의 제안을 차용한 것 같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반쪽 도입’이었다. 소득주도성장 분야는 책이 제안한 정책 외에 최저임금 급격한 인상 등이 대거 추가돼 실행됐다. 하지만 혁신성장 분야는 12대 신산업 육성 등 거창한 구호만 있었지 공급 혁신 방안
“지난해 국내 기업 임원이 대거 옷을 벗게 된 데는 장밋빛 경제 전망을 내놨던 정부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최근 사석에서 만난 대형 물류회사 A임원은 작년 실적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성장률 전망치를 너무 높게 제시하고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계속 내놔 실제론 경기가 냉각되고 있는데도 기업들이 영업 목표를 하향 조정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한 임원들이 교체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경제성장률은 환율, 물가 등과 함께 기업이 매년 사업계획을 짤 때 반영해야 할 기본 요소다. 이들 전망치가 있어야 매출 목표를 잡을 수 있고, 원재료와 임금 등 비용 추정도 가능하다. 삼성 등 자체 연구소를 둔 일부 그룹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은 정부와 한국은행, 국책·민간연구소, 국내외 투자은행(IB),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거시지표 전망치 일부를 평균해 활용한다. 연구소를 보유한 그룹의 계열사도 자체 전망치를 쓰지만 정부의 성장률 전망과 경기 판단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정부는 작년 경기 흐름을 잘못 읽어도 너무 잘못 읽었다. 반도체 한파로 성장률이 1.4%에 그친 2023년 4분기부터 정부는 경기가 회복세를 보인다고 판단하고 지난해 초 2.2%의 성장률 전망치를 제시했다. 실제 작년 1분기 1.3%의 깜짝 성장률이 나오자 대통령실은 고무돼 “수출에 더해 소비, 건설 투자 반등이 함께 이뤄지면서 민간 주도의 역동적인 성장 경로로 복귀했다”고 자평했다. 기획재정부는 작년 5월부터 월별 경제동향(그린북)에서 ‘내수 회복 조짐’을 언급하며 7월 초 성장률 전망치를
8년 전 이맘때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기 전후 국내외 경제 환경은 최근 계엄 사태로 촉발된 탄핵 정국과 흡사한 측면이 너무 많았다. 당시 기획재정부를 취재한 기자는 지금 경제 기사들을 보면서 종종 ‘데자뷔’를 느낄 정도다. 당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을 앞두고 글로벌 통상질서 격변이 예고된 상황이 판박이다. 곧 출범하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 미국 우선주의와 통상 규제가 훨씬 거세질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국가 리더십 부재 속에 처음 트럼프 정부를 맞이한 8년 전 상황도 기업들에는 엄청난 불확실성이었다. 한국만 세계 통상질서 변화에서 배제돼 큰 타격을 받을 것이란 기업들의 위기감도 지금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정치적 혼란이 소비 절벽과 고용 감소를 가속화해 내수 침체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날로 커지고, 연구기관들이 이를 반영해 다음해 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끌어내린 것도 지금과 복사판이었다. 과열 조짐을 보이던 부동산시장이 정부 규제로 갑자기 급랭해 연말 경제에 부담을 주던 상황도, 고환율(강달러)이 상당 기간 지속돼 외환·금융시장에 불안감이 팽배하던 것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이듬해인 2017년 1월 말 발표된 2016년 4분기 성장률은 예상치를 웃돌았다. 민간 연구소들이 마이너스까지 점친 것과 달리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 대비 0.4%(당시 속보치 기준) 증가했다. 민간소비는 부진했지만 설비투자가 6.3% 깜짝 증가한 게 핵심 이유였다. 정치 혼란 와중에도 반도체는 슈퍼사이클에 막 진입해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디스플레이, 전기전자, 화학 등 다른 주력 산업도 전반적으로 양호했던 덕분
한국 기업들은 최근 10여 년 새 부실한 노동 관련 법률과 정부 정책으로 몇 차례 큰 봉변을 당했다. 법률에 적시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정부가 제시한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가 대규모 소송에 휘말리는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통상임금 소송 대란’이 우선 그렇다. 고용노동부가 2012년 9월 ‘통상임금 산정 지침’을 바꿔 근로기준법에 나열되지 않은 정기상여금과 정기적 수당을 제외하자 기업들은 이를 준용해 업무를 처리하다가 근로자에게 줄소송을 당했다. 법원은 정부 지침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계 손을 잇달아 들어줬고, 기업들은 많게는 수천억원을 손해배상했다.2013년 4월 국회가 정년 60세를 법제화한 ‘고령자고용법’을 통과시킨 이후에도 그랬다. 2017년 전면 시행하도록 강제해놓고 그에 필수적인 임금체계 개편은 단지 권고조항으로 둔 ‘입법 부실’이 근본 원인이다. 인건비 급증 예상 등에 기업들이 아우성을 치자 2015년 정부는 공공기관에는 지침으로 임금피크제를 강제했고, 민간기업에는 지원금을 주며 도입을 권고했다. 하지만 정년 때까지 가만히 있던 직원들이 퇴직과 동시에 임금피크제가 무효이니 깎인 급여를 달라는 소송을 곳곳에서 제기했다. 사건마다 엇갈린 판결이 나와 산업 현장에선 지금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년 연장 취지와 달리 많은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이 악화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정년퇴직자보다 명예퇴직 등을 통한 조기퇴직자가 더 늘었고, 청년 고용이 16%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지난 일을 다시 돌아보는 건 정년 연장 논의가 10년 만에 또 불붙고 있어서다. 노사정이 모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정년 연장을 포함
예산당국이 몇 년째 막대한 세수 추계 오류를 되풀이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1년과 2022년 예산안 때는 실제 세수보다 61조원(본예산 대비 오차율 21.7%), 52조원(15.3%)씩 적게 추계하더니, 2023년 예산안 땐 실제보다 56조원(-14.1%) 많게 추정했다. 지난달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예산안도 실제보다 30조원 정도 과대 추계한 것 같다며 “송구하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원인을 놓고 갑론을박도 한창이다. 정부의 세수 추계 모델이 부실하기 때문이란 비판도 있고, 민간 전문가의 참여가 부족해 벌어지는 일이란 분석도 있다. 그동안 정부는 문제를 인식하고 추계 모형 개선 등을 추진했지만 뾰족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왜 그럴까. 전문가들은 세수 추계 시점 자체가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현행 국가재정법에 따라 매년 9월 초까지 다음해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려면 늦어도 8월 중순까진 세수 추계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8월 중순이면 기껏해야 일부 기업의 2분기 실적 정도만 알 수 있는 시점이다. 3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도, 8월 말 법인세 중간예납 결과도, 상반기 실적 발표 후 조정되는 증권가의 기업 실적 연간 전망치도 반영하지 못한다. 사실상 ‘깜깜이 상태’에서 그해 하반기부터 이듬해 연말까지 국내외 경기사이클, 기업 및 자영업자의 매출과 이익, 주식·부동산 등의 가격과 거래량까지 추정해 이듬해 세수를 산출하는 구조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며 성장률과 세수 간 상관관계가 약해지고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부터 지정학적 갈등까지 변수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런 구조가 결국 법인
지난 60년간 기적의 경제사를 일구며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재도약이냐, 추락이냐의 갈림길에 섰다. 한국은 단 두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고 1인당 국민소득과 경제 규모(GDP·국내총생산), 자유·인권 등 보편적 가치 준수, 문화의 세계적 확산 등에서 선진국 요건을 충족한 근대 세계사의 유일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기존 성장 경로가 곳곳에서 한계 상황에 부딪혀 다시 중진국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인구 위기와 잠재성장률 추락, 산업 경쟁력 훼손, 지정학적 불안 등 도처에 깔린 위협 요인을 극복하고 완전히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찾아내 초일류 선진국으로 재도약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다음달 12일 60돌을 맞는 한국경제신문이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경제계와 정·관·학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간 6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을 사시(社是)로 삼아 한국경제신문이 매일 기록해 온 지난 60년 격동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미래 60년을 또 다른 성공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이번 행사에서 한국경제신문은 초일류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한국이 지향해야 할 3대 비전을 제시한다. 경제·산업·기술 초강대국, 문화·예술의 세계적 허브 국가, 존경받는 초일류 시민들의 국가가 그것이다. 지난 23일부터 시작한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자’에서 한국경제신문 데스크들이 제언한 슈퍼 강국 도약을 위한 필수 과제를 응축한 결정체이기도 하다.첫 번째 비전인 경제·산업·기술 초강대국은 기
각 시대는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을 넘어서는 전환기적 명칭이 있다.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와 흐름을 직관적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국 역사학 대가인 에릭 홉스봄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장기 19세기’로 규정하고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914)로 세분했다. 이후 1991년 소련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로 설정하고 대규모 전쟁과 갈등, 경제 발전을 수반한 사회 혁명으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로 정의했다. 스노볼처럼 성장한 한국 경제1960년부터 두 세대 남짓에 걸쳐 이어진 대한민국 성장사는 ‘기적의 시대’로 칭할 만하다. 이 기간 한국은 눈을 굴릴수록 눈덩이가 커지는 ‘스노볼 효과’를 누리며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고속성장은 더 큰 고속성장을 불러와 국내총생산(GDP)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순식간에 배 수준으로 더블링(doubling)됐다. 1961년 21억달러에 불과하던 한국 GDP는 지난해 1조8400억달러로 850배 불어났고, 1인당 GNI도 85달러에서 3만6200달러로 425배 급증했다.장기 19세기가 세 시대로 구분되듯 한국 성장사도 세 단계로 나뉜다. 1961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제1의 성장 단계다. 정부 주도 경제 정책과 수출 주도형 산업화에 성공한 시대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 조선, 철강, 기계산업 등이 빠르게 성장했다. 실질성장률이 연평균 8~10%에 달해 1985년 한국 GDP(1012억달러)는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1961년 철광석, 중석, 생사, 무연탄, 오징어 등이던 주요 수출 품목이 1985년 선박, 가구, 영상기기, 석유제품 등으로 탈바꿈한 것은
지난 6월 기획재정부는 올해 상장 공기업의 경영평가를 내년 초 실시할 때 주주가치를 제고한 업체에 유리하도록 평가 기준을 바꾼다고 통보했다. ‘비계량 재무성과 관리 항목’에 배당 수준의 적정성, 소액주주 보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모범기준 준수 노력 등을 추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항목 전체 배점 4점 중 2점 정도를 부여했다고 한다. 0.1점으로 경영평가 등급이 변하는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큰 배점이라고 공기업들은 설명한다.국내 증시에는 7개 공기업이 상장돼 있다. 이들 중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은 주가가 자산가치의 20~30%에 머물 정도로 극심한 저평가 상태다. 정부가 연초부터 강하게 추진하는 ‘증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이 가장 필요한 기업들이다. 정부가 이런 공기업을 대상으로 주주가치 제고 항목을 추가한 것은 분명 반길 일이지만 실제 밸류업이 될 것으로 믿는 투자자도, 공기업 직원도 별로 없다. 한때 대표적 고배당주로 높은 주가를 구가한 이들 공기업이 적정 배당을 하지 못하는 것도,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를 위한 경영을 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최대주주인 정부 탓이다.문재인 정부가 시작한 탈원전 정책과 물가 안정 명목의 전기·가스요금 억제로 이들 공기업의 실적과 재무구조는 상장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현 정부에선 일부 요금을 인상했지만 원가 미만 수준이 이어지면서 한전은 최근 3년간 43조원의 적자를 냈다. 올 6월 말 193조원의 부채가 쌓여 하루 이자만 121억원을 내고 있다. 가스공사는 연료비만큼 요금을 인상하지 못해 생긴 사실상의 손실 누계액인 ‘미수금&rsqu
세금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민간의 부(富)를 정부로 넘겨 누군가는 덜 쓰고 덜 저축하고 더 일하게 한다. 세금 역사를 보면 이런 일상 수준을 넘어 사람의 행동 자체를 바꾼 사례도 많다. 네덜란드 일본 베트남 등에는 지금도 폭이 좁은 집이 남아 있는데 이는 세금 탓이다. 한때 이들 국가에서 도로에 접한 너비로 재산세를 부과하자 납세자들이 이를 줄이려고 ‘좁은 로켓 같은 집’을 지은 결과다. 유럽연합(EU)이 1990년대 일반 담배보다 시가(여송연)에 낮은 세금을 매기자 ‘담배 같은 시가’가 속속 출시됐다. 소형 트럭보다 승용차에 높은 세금을 때린 칠레에선 화물칸을 개조한 승용차 대용 트럭이, 수입 승합차보다 수입 화물차에 높은 세금을 매긴 미국에선 승합차를 변조한 화물차가 등장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거운 세금이 잘못 설계됐을 때 납세자들은 늘 허점을 찾아 세금을 회피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때론 과세 대상 물건과 관련 시장이 왜곡되는 현상이 되풀이됐다. 더 낮은 대체재의 세금이 있을 때 이런 현상은 더 쉽게 진행됐다. 본성에 가까운 이런 인간의 성향을 무시한 세제는 결국 실패한다는 교훈도 남겼다.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가깝게는 문재인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2020년 ‘7·10 대책’을 내놨다가 실패했다. 다주택자 대상 양도세율을 최대 82.5%(지방세 포함)까지 높였지만 오히려 공급만 줄여 집값을 더 끌어올렸다. 상속, 증여, 양도는 내 재산을 남에게 넘긴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한 행위다. 생전에 또는 사후에, 유상으로 또는 무상으로 넘겼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양도세율을 증여세율(최고세율 50%)보다 훨씬 높게 올
2004년 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통과되고 1년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된 퇴직연금제도는 출범 당시 큰 기대를 모았다. 외부에 적립금을 쌓아둬 회사가 파산해도 근로자가 퇴직급여를 떼일 위험이 사라지고 노후 안전판도 크게 확충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1층 국민연금과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3층 개인연금 사이에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2층 퇴직연금이 새로 들어와 ‘노후보장 연금 3층 구조’가 제도적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에선 국내 증시의 대세 상승을 이끌 수급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가입자들이 실적배당형 투자 상품에 대거 몰려 코스피지수를 장기 우상향시킬 것이란 희망이 컸다.올해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지 20년이 되면서 이런 기대는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는 게 입증됐다.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이 매달 근로자 급여의 8.33%를 납부하면서 퇴직연금 적립금은 어느덧 400조원이 됐고 10년 뒤엔 1000조원까지 불어날 것이라지만 누구도 퇴직연금을 ‘2층 연금’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해 연금 형태로 퇴직연금을 받은 사람은 10%뿐이었다. 나머지 90%는 평균 1645만원을 일시금으로 받아 갔다.중도 인출을 너무 쉽게 허용한 이유도 있지만 정기예금 등 원리금 보장상품에 자금의 90%가 몰리면서 운용수익률이 물가상승률조차 못 따라갈 정도로 낮은 것이 핵심 원인이다. 국내 퇴직연금의 연환산 수익률은 최근 5년과 10년간 각각 2.35%, 2.07%에 그쳤다. 확정급여형(DB)이든 확정기여형(DC)이든 퇴직연금 가입자(기업과 근로자)는 투자 상품 및 비율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손실(시장 위험)을 온전
한국의 엉터리 법률이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최저임금법처럼 허술한 법률이 또 있을까 싶다. 법이 규정한 최저임금 결정 원칙과 기준, 결정체계가 구조적으로 양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법은 최저임금을 근로자의 생계비와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하고 업종(사업의 종류)까지 구분해 정할 수 있게 규정(4조1항)한다. 경제성장률, 물가 등 각종 경제지표부터 업종별 생산성·지급 능력, 인상 이후 소득분배 효과와 노동시장 충격까지 복잡다단한 요인을 분석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조항이다. 그랬다면 한국도 최저임금 심의·결정을 영국처럼 독립적인 전문가집단이 하도록 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하지만 최저임금법은 황당하게도 이를 노·사·공익위원 9명씩이 참여하는 최저임금위원회에 맡겨 놓고 있다. 이해 당사자인 노사까지 참여하는 일종의 전국 단위 임금 협상 구조로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렇다 할 영향 분석이나 계산식도 없이 노사의 첨예한 대립과 소모적 갈등 속에 정부 의중이 담긴 공익위원 안의 졸속 표결로 인상률이 결정되는 일이 매년 되풀이된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최저임금이 결정될 수 있도록 해 놓고 법에 형사처벌(3년 이하 징역) 조항까지 넣어뒀다.그럼에도 최저임금법은 1988년 시행 이후 30년 가까이 그런대로 굴러갔다. 최저임금 시급이 1990년 690원, 2000년 1865원, 2010년 4110원으로 낮게 관리돼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노동계의 ‘최저임금 1만원’ 슬로건이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 반영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2017년 6470원이던 최저임금 시급이 2019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A캐피털은 작년 말 우량 자산을 증권사에 담보로 제공하고도 연 14%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채권시장에서 화제가 됐다. 비(非)금융지주 계열 캐피털사의 열악한 자금조달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저축은행처럼 캐피털사들도 수십조원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브리지론 및 중·후순위 대출을 내줘 시장이 자산 건전성을 의심하고 있다. 캐피털사들은 한편에선 저금리 시절 연 7~8%를 받고 부동산 PF 대출을 내준 뒤 ‘레고랜드 사태’ 후 6개월마다 만기를 연장해주고, 다른 한편에선 고금리 시대에 그 두 배 수준의 금리로 신규 자금을 조달하는 ‘역마진 경영’을 하고 있다. PF 사업이 무너지면 대출 원리금조차 회수하지 못한다.역마진 경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2022년 글로벌 금리 인상기 이후 수만, 수십만 중견·중소 제조업체가 겪는 상황이다. 영업이익률이 높아야 6~7%인 신용등급 A~BBB등급 제조업체들은 요즘도 연 9~12% 금리로 돈을 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무역협회가 지난달 417개 수출기업 최고경영자(CEO) 및 임원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자 비용이 영업이익과 같거나 초과한다’는 응답이 57.3%에 달했을 정도다.기업이 역마진을 버티는 이유는 간단하다. 곧 상황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희망이 팽배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국 수출이 회복되는 가운데 미국 중앙은행(Fed)이 올해 여섯 차례 금리를 내리고 한국은행도 이르면 상반기에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란 기대가 컸다. 고금리 시대가 서서히 저물면서 올해 경기는 상저하고일 것으로 예상됐다.이달 들어 상황이 돌변
2002년 에너지기업 엔론의 분식회계 사태로 자국 회계기준(US-GAAP)의 신뢰도가 추락하자 미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대안으로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을 검토했다. 상당 기간 고민하다가 2012년 도입을 포기했다. US-GAAP은 회계처리 방법을 일일이 감독당국이 제시하는 ‘규정 중심’인 것과 달리 IFRS는 큰 원칙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회계처리는 기업에 맡기는 ‘원칙 중심’인 게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 ‘기업이 자신의 경제적 실질을 가장 잘 안다’는 철학에 근거한 IFRS는 기업과 회계 전문가들이 충분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판단했다면 같은 사안에 다른 회계처리도 인정한다. 미국은 그렇게 되면 기업 간 비교 가능성과 투자자 보호 등이 약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IFRS를 도입하지 않았다.미국처럼 규정 중심 회계기준(K-GAAP)을 쓰던 한국이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2011년 IFRS를 전면 도입하자 큰 우려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 내 회계인력, 외부감사 독립성, 전문가 견해에 대한 존중, 투자자의 회계 이해도가 훨씬 부족한 한국이 미국도 포기한 원칙 중심 기준을 제대로 받아들일지 의구심이 많았고, 실제 IFRS 시행 초기부터 큰 혼란을 겪었다.IFRS의 손익계산서에 영업이익 항목이 없어 투자자의 반발이 거세자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이를 허용해줬다. 2012년엔 두산인프라코어가 발행한 영구채가 자본인지 부채인지를 놓고 회계기준원,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가 다른 의견을 내놔 몇 달간 혼란을 겪다가 IFRS해석위원회(IC) 판단에 따라 겨우 자본으로 결론 났다.2015년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가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지배력 변경 회계처리’
내년 도입할 예정이던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여부를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대주주에게만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현행 주식 과세 제도를 없애고 대주주 여부와 관계없이 주식과 채권, 펀드, 파생상품 등 금융상품 매매(환매)를 통한 수익이 일정액(주식 5000만원, 기타 250만원) 이상이면 20%(3억원 초과분은 25%) 세금을 일괄 부과하는 제도다. 문재인 정부에서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해 2023년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국내 증시 매수세 감소 등을 우려한 개인과 금융투자업계의 거센 반발, 금리 급등에 따른 증시 급락 등을 감안해 여야가 2022년 말 시행을 2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2024년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 참석해 “금투세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즉각 반대하면서 소득세법 개정 사항인 금투세 폐지 문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민주당은 여야 합의를 정부가 단독으로 깬 점, 세수 감소, 조세 형평성 등을 이유로 금투세 폐지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여당이 소수당인 상황이라 금투세가 실제로 없어질지는 예견할 수 없다. 4월 총선을 앞둔 점 등을 고려할 때 여야가 2022년처럼 장기간 대립하다가 연말쯤에 가서야 타협을 시도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금융투자업계에선 이렇게 장기간 금투세 폐지 여부가 확정되지 않으면 금융회사와 투자자가 큰 혼란을 겪을 것으로 우려한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해 업계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당장 금투세 과세에 필요한 전산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증권사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2022년에도 컨설팅을
미래에셋증권이 12일 인도 현지 증권사 쉐어칸을 4800억원에 인수했다. ‘포스트 차이나’로 부상하는 인도 시장에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의 일환이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이날 서울 당주동 포시즌스호텔에서 한 단독 인터뷰에서 “미래에셋 글로벌 진출의 새로운 20년은 인도 증권사 인수로 시작한다”며 “미래에셋증권은 급성장하는 인도 시장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도는 무궁무진한 성장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며 “앞으로 증자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투자해 (쉐어칸을) 5년 안에 5위권 증권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쉐어칸은 2000년 설립된 인도 10위의 증권사로 지난해 2100만달러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임직원 수 약 3500명이 인도 전역 400개 지역의 130여개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다.이번 인수합병(M&A) 거래를 통해 미래에셋그룹은 글로벌 사업(운용자산 기준)을 1000억달러 규모로 키웠다. 2003년 해외 진출을 시작한 지 20년만에 이룬 성과다. 박 회장은 2018년부터 그룹의 글로벌전략가(GSO)를 맡은 후 해외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2018년 미국 혁신 테마형 상장지수펀드(ETF) 선두기업 글로벌X, 지난해 영국 ETF 시장조성 전문회사 GHCO 등을 인수를 주도했다.박 회장은 “지금까지 미래에셋은 해외시장에서 총 13번의 인수합병(M&A)가 있었다”면서 “그 과정을 통해 해외시장에서 사업을 어떻게 전개해야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우리에겐 있다”고 했다. 이어 “베트남 시장에서 증권사 순위 5등 안에 들어간 것이나 인도네시아에서의 성공을 진출 당시에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며 “&
반도체 팹리스 기업인 파두가 기술특례 방식을 통해 지난 8월 시가총액 1조5000억원의 유니콘 기업으로 화려하게 상장한 뒤 석 달 만인 지난달 제로(0)에 가까운 올 2분기 매출을 발표해 증시에 큰 충격을 줬다. ‘뻥튀기 상장’ 논란이 일며 주가가 폭락했고 투자자들은 회사와 주관사가 실적 쇼크를 알면서도 상장을 강행했다며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태세다.파두 사태는 국내 기업공개(IPO) 과정 곳곳에 잠복한 제도 부실이 초래했다. 예비상장기업은 실적 공시 유예 규정을 잘만 활용하면 최대 6개월간 실적 쇼크를 숨길 수 있었다. 상장 단계마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주관사와 한국거래소, 금융감독원은 인력 부족 등으로 겉핥기식 부실 검증을 했다. 당국은 부랴부랴 제도 개선에 나섰다. IPO 직전 월매출 공개를 의무화했고, 주관사를 대상으론 상장 직후 급락 시 해당 공모주를 강제로 되사도록 하는 풋백옵션을 확대했다. '부실 수요예측' 통해 공모가 결정하지만 이번 사태 발생의 근본 배경에 대해선 아직 개선 논의가 없다. 가격 발견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현행 수요예측 제도가 그것이다. 국내에서 수요예측엔 공모주펀드 같은 기관만 참여한다. 전문가로서 예비상장사가 제시한 과거 및 미래 추정 실적, 사업성, 기술력 등 ‘펀더멘털 요인’을 면밀히 검증하고 적정 공모가를 산정하는 기능을 맡긴 것이다. 그 대가로 기관은 높은 비중의 공모주를 배정받는다.하지만 국내에서 이 취지에 맞게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은 사실상 없다. 펀더멘털보단 ‘정성적 요인’을 더 많이 고려한다. 상장 직후 ‘따상’을 노리는 개미들이 몰려들어 공모가
1년 새 17배 폭등했던 영풍제지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검찰이 지난달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 4월 라덕연 일당의 주가조작, 6월 바른투자연구소 주가조작에 이어 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국내 증시에서 주가조작은 늘 있었지만, 올해는 여러모로 과거와 딴판이다. 과거 주가조작은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이른바 ‘잡주’를 대상으로 허위 호재를 흘려 주가를 폭등시킨 뒤 6개월 이내에 털고 나오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었다.반면 올해 주가조작은 공통적으로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우량주·자산주를 타깃으로 했다. 별다른 호재 없이 매일 야금야금, 길게는 2~3년간 저점 대비 최대 10~20배씩 주가를 끌어올린 점도 달랐다. 그런 만큼 피해는 더 광범위하고 컸다. 주가조작 적발 후 주가는 최대 10분의 1 토막으로 회귀해 막판 추격 매수한 개인들은 큰 손실을 봤다. 가격 발견 기능이 고장난 증시많은 증권사가 함께 손해를 본 것도 이례적이다. 증권사들은 만기 없는 차액결제거래(CFD)부터 6개월짜리 신용융자, 초단기 미수거래까지 대규모 신용을 제공했다가 많게는 수천억원 손실을 봤다. 작전 대상 종목이 잡주가 아니라 신용 제공 대상인 우량주·자산주다 보니 발생한 현상이다.이런 피해는 물론 주가조작 세력의 불법이 1차적 원인이다. 하지만 국내 증시의 가격 발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피해 규모가 확대된 측면도 크다. 유동성을 늘려 주가를 올리는 신용은 허용하면서 주가 이상 과열을 완화하는 공매도는 2년 넘게 제한한 비대칭적 규제가 초래한 현상이다. 코스피200 및 코스닥150지수에 포함되지 않는 중소형주는 공매도가 불가능해 과열된 주가가 장기간 이어지는 ‘가격 발
주주행동주의펀드가 국내에서도 활성화하고 있다. 주식을 산 뒤 배당 확대, 지배구조 개선 등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 개입해 주가를 올려 이익을 내는 펀드다.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이 최근 3년 새 여섯 배 급증했을 정도다. 이런 배경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깔려 있다. 상장사 주가가 심하게 저평가돼 있어 행동주의를 통해 주가를 올릴 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올해 5월 기준 코스피200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9배로, 미국 등 23개 선진국 평균(2.9배)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그렇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한 원인은 뭘까. 강성부 KCGI 대표,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 등 국내 행동주의펀드 간판 매니저들이 이에 대해 흥미로운 대답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한국경제신문사가 지난 9월 11~15일 연 ‘코리아 인베스트먼트 위크(KIW) 2023’에 연사로 참여해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범으로 지목이들 역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취약한 지배구조 및 대주주의 사적이익 추구 경향, 미흡한 주주환원, 효율적 자본 재배치 실패로 인한 수익성 저하 등에 기인한다는 데 동의했다. 근본적으로는 과도한 상속세제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고 분석했다. 대주주에게 자본이득세(주식 양도소득세)는 25%의 최고세율을 부과하는 데 비해 상속세엔 불균형적으로 최대 60% 세율을, 그것도 시가에 매기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이런 세제 아래에서 상장사 오너는 기본적으로 주가를 억누르는 게 유리하다. 주가가 오르면 상속세가 늘기 때문이다. 알짜 사업과 좋은 일감을 자녀 명의 개인회사에 몰아주는 것도 ‘합리적 선택’이다. 자녀가 개인회사 지분을 팔면 25% 양도세만 내면 돼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이 1년간 시범운영을 거쳐 지난달부터 국내에서도 본격 시행됐다. 연금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정해진 상품(디폴트옵션 상품)에 자동 투자되는 제도다.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강압이 아니라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넛지(nudge) 이론에 기반한다. 금융지식이 낮은 일반인이 퇴직연금을 방치해 놨을 때 운용 지시 권한을 전문가(연금사업자)가 슬쩍 넘겨받도록 해 수익률 제고를 추구한다. 미국, 영국,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디폴트옵션을 적극 시행해 지난 10년간 연평균 8~9% 수익률을 거둬 효과를 입증했다.한국도 디폴트옵션 본격 시행으로 2017~2021년 연평균 1.94%에 불과했던 퇴직연금 수익률이 크게 개선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금융회사들도 수익률이 높은 쪽으로 연금자산이 대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자사 디폴트옵션 상품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적립금 방치 가능성 여전하지만 국내 디폴트옵션이 연금 선진국처럼 제대로 작동할지는 두고봐야 한다. 연금 선진국에서의 제도 성공 요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곳곳에 남겨둔 채 시행되고 있어서다. 디폴트옵션에 가는 경로부터 길다. 해외는 ‘가입자의 운용 미(未)지시 → 디폴트옵션 발동’ 2단계만 있지만 한국은 독특하게도 이 앞에 ‘가입자의 디폴트옵션 상품 사전지정(선택)’ 단계를 추가했다. 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 논란을 확실히 없애겠다는 취지지만 사전지정을 하지 않으면 디폴트옵션이 발동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디폴트옵션을 발동하지 않으면 적립금은 이자가 매우 낮은 고유계정(현금성자산)
‘위기 때일수록 자산과 자본은 회계 처리된 형식보다 실질이 중요해진다.’한때 글로벌 은행 위기 촉발 우려를 키운 올해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은 회계적 관점에서 이런 교훈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SVB는 2019~2022년 기술산업 호황 때 급증한 예금을 대출보다 미국 국채 등 유가증권을 통해 운용하고 900억달러가 넘는 채권을 ‘만기보유증권’으로 회계 처리했다. 매 분기 시가 평가해야 하는 ‘단기매매증권’이나 ‘매도가능증권’과 달리 취득가액으로 계속 장부에 기입할 수 있는 계정과목이다. SVB가 작년 이후 금리 폭등으로 채권 가격이 급락해도 만기보유증권은 평가손실을 잡지 않은 이유다.하지만 고객들의 예금 인출 증가로 SVB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채권을 매각하면서 손실이 현실화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장부에 잡히지 않았지만 SVB의 만기보유증권 ‘미실현 손실’이 170억달러에 달한다는 시장 분석이 확산했고 결국 예금 인출이 늘며 파산했다. 어떤 회계 처리를 하든 채권은 금리 급등기에 손실이 난다는 단순한 진리도 확인됐다. 자본임에도 위기 때 '의무 상환'국내에선 작년 말 이후 ‘영구채’로 불리는 신종자본증권의 회계적 형식과 실질을 놓고 논란이 커졌다. 만기 30년 이상이고 5년마다 발행사가 조기 상환할 권리(콜옵션)를 보유해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증권이다.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비율, 보험사의 신지급여력제도(K-ICS)비율, 증권사의 영업용순자본비율(NCR) 같은 재무건전성 지표 산정 때도 전액 자본으로 인정된다.그러나 국내 신종자본증권은 정작 위기 때 자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됐다. 작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發) 무더기 하한가 사태로 불거진 주가조작 의혹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 주가조작 실체는 수사로 밝혀지겠지만, 이 사태를 초래한 몇몇 구조적 문제는 벌써부터 명확하다. 현행 금융당국의 주가조작 감시 시스템은 장기간 야금야금 진행되는 통정매매엔 무용지물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적은 돈으로 주가조작 효과를 극대화한 차액결제거래(CFD)는 누가, 얼마나 샀는지도 모른 채 방치돼 왔다.연기금 운용 시스템의 큰 허점도 드러났다. 연기금은 대성홀딩스, 서울가스, 삼천리에 최근 1년간 총 1300억원을 투자했다가 이번 사태로 대규모 손실을 봤다. 최대 20배 폭등해 주가수익비율(PER)이 100배를 넘을 정도로 잔뜩 거품이 낀 종목임에도 연기금은 어찌 된 일인지 대량 매수를 했다.SG발 폭락 사태에 연기금 큰 손실엄밀하게 이들 종목을 산 주체는 ‘일임자문’ 형태로 연기금 돈을 위탁 운용하는 펀드(운용사)였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들은 “연기금이 운용사에 지나치게 경직적이고 획일적인 위탁 운용 규정을 따르도록 강요하다가 문제가 터졌다”고 입을 모은다.국민연금이 최초로 만들었고 나머지 많은 연기금이 준용하는 현행 위탁 운용 규정에 따라 국내 운용사들은 연기금 위탁 펀드와 해당 펀드의 벤치마크(BM) 간 수익률 괴리율을 최대 1%포인트 미만으로 관리하도록 사실상 강제된다. 그 이상 괴리가 발생하면 돈을 준 연기금에 이유를 보고해야 하고, 나중에 감사원 감사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어서다.아울러 운용사들은 일일 매수 제한도 지켜야 한다. 하루에 특정 종목 발행 주식의 0.2% 이상을, 그날 거래대금의 20% 이상을 못 산다. 연기금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십수 년간 국내 재테크시장의 주요 흐름 중 하나는 상장지수펀드(ETF)의 급성장, 액티브 주식형 공모펀드의 몰락으로 요약된다. ETF 시장 규모는 2010년 10조원 돌파 후 2019년 50조원으로 커진 뒤 지난달엔 90조원까지 팽창했다. 액티브 주식형 공모펀드는 ‘펀드 열풍’ 정점이었던 2008년 69조원에 달했지만 지난달 15조원으로 5분의 1 토막 났다.정부는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매년 크고 작은 ‘공모펀드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수수료가 싼 온라인 판매망을 도입했으며 자투리 펀드를 없앴고 펀드 공시도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도 공모펀드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상황을 돌리지 못했다.운용업계는 정부가 공모펀드 세제 혜택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엔 ETF로 상장하면 공모펀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란 요구도 하고 있다. 잇단 대책에도 활성화 실패이런 요구대로만 하면 정말 공모펀드가 부활할까. 지난달 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목표 금액 300억원을 팔아 치운 VIP자산운용의 공모펀드 ‘VIP 더 퍼스트 펀드’는 이 물음에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줬다. ‘가치투자’를 앞세우며 2003년 투자자문사로 출발한 뒤 2018년 사모 전문 운용사가 됐다가 작년 하반기 공모 운용사 인가를 받은 운용사다.고유 자금 34억원을 펀드에 투입해 공모펀드 최초로 손익차등형 구조를 짠 게 주효했다. 펀드 손실은 10%까지는 운용사만 보고 수익이 나도 15%까진 운용사가 보수(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15%를 넘는 수익이 나면 그제야 초과 수익의 35%를 성과 보수로 받는다. 공모펀드도 경쟁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사실 손익차등형 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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