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성
실리콘밸리 IT 비즈니스센터장
김준성 실리콘밸리 IT 비즈니스센터장
모두가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에 몰두하는 사이 인공지능(AI) 경쟁의 병목은 전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고성능 칩과 서버를 갖춰도 제때 전력망에 연결하지 못하면 가동할 수 없다. 지난 9월 미국 실리콘밸리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AI 인프라 서밋’에서도 화두는 칩이 아니라 전력이었다. 경쟁의 질문은 ‘칩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서 ‘같은 전기로 얼마나 더 많이 계산하느냐’로 바뀌고 있다.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는 데이터센터가 미국 전체 전력 사용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4년 4.7%에서 2030년 11.8%로 약 2.5배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려면 발전소만 늘려서는 부족하다. 송전망과 변압기, 배전반, 전력제어 설비를 함께 갖춰야 한다. 미국 에너지부도 변압기와 송배전 설비 부족, 긴 납기를 주요 과제로 꼽는다.

현장에선 더 많은 전력 못지않게 전력을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이 주목받는다. 클라우드기업 람다는 엔비디아의 전력관리 솔루션을 적용한 검증 시험에서 같은 전력으로 GPU 서버를 19% 더 가동했고 AI 처리량을 24% 높였다. 전력 수요가 증가하면 변압기·배전반 시장이 커지고, 효율 경쟁이 붙으면 전력제어와 냉각설비의 가치가 높아진다. 한국 기업에 새 수출시장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시장이 커진다고 수주가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데이터센터 건설은 인허가와 전력 공급 일정에 따라 착공과 발주 시점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계약 전에 실제 착공 여부와 발주 일정을 확인해야 한다. 일정이 바뀔 때의 납품·대금 지급 조건까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미국 발주처가 보는 것은 가격과 성능만이 아니다. 약속한 품질과 납기를 지키고 설치 이후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를 살핀다. 이런 신뢰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이 아니라 제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안전 기준과 설치 조건을 미리 반영하지 않으면 재설계와 재시험에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

인증을 갖췄다면 다음 관문은 발주처의 공급사 심사다. 시험 결과와 공장 품질관리, 생산능력, 납기 대응력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발주 주체가 전력회사인지, 데이터센터 운영사인지, 시공사인지에 따라 요구 조건도 달라진다. 계약 이후가 더 중요하다. 데이터센터에서 장비가 고장 나면 서비스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운전 지원 계획과 예비부품 확보 방안, 고장 시 출동 체계를 제시하고 현지 서비스 업체와 협력해야 한다. 성과는 숫자로 남겨야 한다. 전력 손실을 얼마나 줄였는지, 복구 시간을 얼마나 단축했는지가 다음 수주를 결정한다. 작은 납품이라도 납기 준수와 안정 운영의 기록이 쌓이면 가장 강력한 영업 자료가 된다.

KOTRA는 현지 수요 발굴을 출발점으로 인증, 파트너십, 공급망 진입, 후속 서비스까지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 전 과정을 연결해 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AI 시대를 반도체의 이름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 반도체를 깨우는 것은 벽 뒤에서 전기를 보내는 변압기와 배전반이다. 전력이 끊기면 데이터센터가 멈추고, 신뢰가 깨지면 수출도 중단된다. 기술이 시장의 문을 연다면 그 문을 오래 열어 두는 것은 신뢰다. 가격 경쟁력과 기술은 따라잡힐 수 있지만 쌓인 신뢰는 쉽게 복제할 수 없다. 그것이 한국 전력기자재가 북미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