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금융회사가 두 나라 기업의 자금을 모아 일본에 대규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 1차 투자 목표만 1조1500억엔(약 10조원)으로 투자 규모를 더 늘릴 예정이다. 관련 한국 기업에는 일본 AI 인프라 시장을 공략할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1일 양국 금융·산업계에 따르면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일본 SBI금융그룹이 공동 펀드를 조성해 일본 AI 데이터센터에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번 투자로 구축할 데이터센터는 전력 용량 기준으로 200㎿ 규모다.
두 회사는 SK그룹과 삼성그룹, LG그룹 등에 참여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치권도 힘을 싣고 있다. 지난 8월 방한한 기하라 세이지 자민당 의원(중의원·전 관방 부장관)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9월에는 이 회장이 한국을 찾은 일본 참의원 대표단과 회동했다. 같은 달 말에는 김 회장과 기타오 요시타카 SBI홀딩스 회장이 만나 관련 논의를 이어갔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밝힌 기업들은 펀드 출자와 연계해 데이터센터에 자사 제품과 장비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삼성SDI, 냉각설비는 LG전자 등이 공급사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두 금융회사는 연말까지 자금 조달과 투자 계획의 밑그림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韓·日 경협 업그레이드…에너지 안보 이어 'AI 전쟁' 공동대응 회장단 회동서 논의 급물살…투자규모 10조엔 확대 계획도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일본 SBI금융그룹의 공동 투자펀드 규모는 1조1500억엔(약 10조원)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1차 사업이 순항할 경우 향후 30년에 걸쳐 10조엔 이상으로 투자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양국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한 ‘인공지능(AI) 인프라 동맹’이 구축될 전망이다. 정치적으로도 한·일 관계가 한층 긴밀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손정의 ‘스타게이트’ 벤치마크
AI 경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설비를 개별 기업 및 국가가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번 공동 투자 구상의 배경이다. 투자은행(IB) 영역에서 입지를 구축한 양국 대표 금융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관련 기업이 장비와 기술을 공급하면 대규모 사업에 따른 리스크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금융지주 산하 한국투자증권은 마켓인사이트·한경에이셀 리그테이블에서 주식발행(ECM) 분야에서 올 3분기 누적 기준 1위에 오르는 등 독보적인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투자 역량과 함께 국내 기업·기관투자가와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한 덕분이다.
일본 최대 온라인 증권사를 거느린 SBI는 은행·보험·자산운용 등에서도 성과를 낸 종합금융그룹이다. 두 금융사는 이번 기회를 통해 AI 인프라 관련 새로운 투자 및 운용 사업을 모색할 계획이다. 지난 9월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과 기타오 요시타카 SBI홀딩스 회장의 회동을 계기로 구체적인 협력 논의가 급물살을 탄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 기업이 주목하는 것은 투자 수익과 제품 공급 기회다. 데이터센터에는 연산과 데이터 저장을 위해 반도체뿐 아니라 서버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는 냉각 설비,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각종 장비가 필요하다. 관련 기업은 펀드 출자를 통해 해당 사업 기회에 접근하게 된다.
이번 협력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미국 데이터센터 투자 사례를 벤치마크한 것으로 알려졌다. 4년간 미국 AI 인프라 구축에 5000억달러(약 668조원)를 투자하는 ‘스타게이트’ 사업이 대표적이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을 지낸 기하라 세이지 중의원 의원 등 일본 정치권 인사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도 업계는 주목한다. 건설 과정에서 토지와 전력 공급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중요한 데이터센터의 사업 특성 때문이다. 공동펀드 설립 전에 규슈전력과 사업 후보지에 대해 전력 공급을 논의한 배경이다.
◇확대되는 한·일 협력
이번 협력은 한국의 이재명 정부와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 출범 이후 속도를 내는 두 나라 협력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대규모 액화천연가스(LNG) 수입국인 양국은 에너지 공동 구매와 물량 교환 등 에너지 분야 협력을 강화했다. 한국가스공사는 지난해 일본 최대 민간 화력발전 기업인 제라와 LNG 물량 교환을 했다. 양사는 공동구매와 트레이딩, 에너지 위기 시 수급 대응을 위한 협력도 이어가기로 했다.
AI 데이터센터 공동 투자는 이런 협력 흐름을 첨단산업 기반 구축으로 넓힐 수 있는 사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너지 분야에서 두 나라의 구매력과 비축·수급 역량을 합쳤다면 데이터센터에서는 자금과 장비, 전력·부지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양국 정·재계에서는 국제 경제·안보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장기적으로 유럽연합(EU) 수준까지 협력 규모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 전 일본 총리는 지난달 29일 도쿄대에서 열린 국제한반도포럼 일본 세미나에서 EU의 출발점이 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경제협력을 거론하며 “한·일 협력도 경제를 중심으로 장기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공동펀드 구상이 구체화하면 양국 정·재계의 논의가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일 양국은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 주력 산업에서 경쟁하는 분야가 많아 협력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자금 조달 규모뿐 아니라 양측이 얼마나 양보하고 실익을 나눌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