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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대 높은 프랑스 와인 꺾었다…전설의 와이너리가 한국에 온 이유 [현장+]
1976년 '파리의 심판' 주역 스택스 립 마셔보니
미국 와인의 자존심…서울서 50주년 기념 와인 공개
미국 와인의 자존심…서울서 50주년 기념 와인 공개
지난 26일 서울 잠실 와인바 ‘르몽뒤뱅’.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명문 와이너리 스택스 립 와인 셀라스의 와인 다섯 종이 테이블에 차례로 올랐다. 소비뇽 블랑과 샤르도네 등 화이트 와인 두 종에 이어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레드 와인 세 종이 등장했다. 가장 관심을 모은 제품은 100만원대를 호가하는 ‘S.L.V. 카베르네 소비뇽 2023’이었다. 50년 전 프랑스 최고급 와인들을 제치고 세계를 놀라게 한 와인과 같은 포도밭에서 생산한 제품이다.
이날 행사는 1976년 세계 와인업계의 판도를 뒤집은 ‘파리의 심판’ 5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스택스 립을 비롯한 이탈리아 안티노리 가문의 미국 와이너리를 총괄하는 후안 무뇨스오카는 이탈리아어로 "푸투로 안티코(Futuro Antico)"라 말했다. 우리말로 ‘오래된 미래’라는 뜻이다. 무뇨스오카는 와이너리의 역사를 두고 과거의 영광보다 미래를 강조했다. 그는 “대부분의 변화는 혁신적인 무엇보다는 근본적인 것, 즉 포도 재배에서 시작한다”며 “안티노리는 결국 농사짓는 가문이다. 모든 원칙은 좋은 포도를 길러 아름다운 와인을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고 소개했다.
프랑스 최고급 와인 꺾은 미국의 무명 와인
미국 와인 스택스 립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행사에서다. 이 행사에는 프랑스 와인 전문가 9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와인의 생산지와 브랜드를 가린 채 품질만으로 평가하는 자리였다.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설립된 지 6년에 불과했던 스택스 립의 ‘S.L.V. 카베르네 소비뇽 1973’이 레드 와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 보르도의 최고급 와인인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브리옹 등을 제친 것이다.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도 캘리포니아의 샤토 몬텔레나가 1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와인이 세계 최고라는 통념을 깨뜨린 ‘파리의 심판’으로 기록됐다. 미국 와인의 위상을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우승한 스택스 립의 와인 병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됐다.
반세기가 흐르면서 소유주는 바뀌었다. 2007년 이탈리아 와인 명가 안티노리 가문과 미국 생 미셸 와인 에스테이트가 공동 인수했으며, 2023년 안티노리 가문이 지분 100%를 확보했다. 1385년부터 와인을 생산해 온 안티노리는 26대에 걸쳐 와인 사업을 이어온 가문이다.
600년 와인 명가의 변화…포도밭에 로봇을
안티노리가 스택스 립을 인수한 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포도밭이었다. 외부 재배자로부터 포도를 사들이는 비중을 줄이고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생산 체계를 바꿨다. 기존 포도밭을 활용하는 동시에 새로운 포도밭도 매입했다. 무뇨스오카는 “와이너리 경영은 1년이나 10년이 아니라 세대 단위로 바라봐야 한다”며 “30년 사용하고 갈아엎을 땅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줄 포도밭이라는 관점에서 투자한다”고 설명했다.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생산 현장에는 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자외선을 비추는 로봇이다. 포도나무에 자외선을 조사해 곰팡이병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수세기 동안 곰팡이병 방제에 사용해 온 황을 일부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접목한 것이다. 양조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캘리포니아 와인의 특징으로 꼽혔던 강한 오크 향과 묵직한 질감 대신 포도 본연의 산도와 섬세한 풍미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택스 립의 와인 스타일은 흔히 ‘벨벳 장갑 속의 강철 주먹’으로 표현된다. 부드러운 질감 속에 강한 힘과 구조감을 감추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2023년산 S.L.V.는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한 1973년산 와인으로부터 정확히 50년 뒤 생산된 빈티지다. 2023년 나파밸리는 비교적 서늘하고 긴 포도 생육 기간을 거쳐 장기 숙성 잠재력이 높은 와인이 생산된 해로 평가받는다.
무뇨스오카는 이날 간담회에서 시종일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50년 전 프랑스 와인의 아성을 무너뜨렸던 스택스 립이 이제는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의 혁신을 통해 다음 50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