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마다한 공학도, 대만서 韓반도체 길을 묻다
“대만 반도체의 저력은 TSMC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관련기업이 얽힌 산업 생태계에서 나옵니다.”

2023년부터 2년간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대표를 지낸 이은호 고려대 경제기술안보연구원 경제안보센터장(사진)은 16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근 출간한 <칩노믹스>에서도 “지난 수십년간 TSMC와 성장을 함께 하며 긴밀하게 협력해온 중소기업들과의 공조 체제가 경쟁력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이 센터장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과학잡지를 읽고 라디오 키트를 조립하던 ‘과학 소년’이었다. 의대에 가라는 부모의 권유에도 공학이 좋아 1979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원이던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70만원 거금을 주고 애플 호환 PC를 사서 유압 실린더 제어기를 직접 만들어볼 만큼 실험을 좋아했다. 문교부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조지아공대에 간 그는 1991년 로봇의 눈에 해당하는 광학 시스템을 개발해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직후 서울대 자동화연구소에서 로봇과 무인헬기를 연구하다가 1994년 공직자로 방향을 틀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KATS) 공업연구관으로서 국제표준화기구(ISO) 협력 업무를 수행했고, 동북아통상과장을 맡아 다수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참여했다. 퇴임 후 2020년 전략물자관리원장을 거쳐 2023년 대만에 부임했다. 그는 “공학박사 출신 공관장이 이례적이다보니 대만 기업인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 덕분에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 회장도 네 차례나 만났다. 그가 직접 들은 경영철학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협력사와의 관계였다. 핵심 기술을 TSMC 내부로 끌고 오기보다 협력사가 독자적인 역량을 갖추도록 역할 분담에 나섰다는 것이다. 실제 TSMC는 파운드리 기업으로서 팹리스와 설계자산(IP), 후공정, 서버·부품 등 각 분야별 기업과 함께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센터장은 “세계 20대 팹리스 가운데 대만 기업이 6곳인데 한국은 한 곳도 없다”며 “TSMC가 생산을 맡으면서 설계에 특화한 팹리스와 IP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칩노믹스>의 핵심 메시지는 “안주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센터장은 한국이 기존 성공 방식에 머무르는 동안 대만은 연구인력의 창업을 적극 이끌어냈다고 봤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보다 먼저 설립됐지만 ITRI에서의 ‘실험실 창업’이 훨씬 활발하다”며 “한국은 대기업 취업이나 교수·관료 같은 안전한 길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반도체의 약점으로는 메모리 편중을 들었다. 대안으로 자동차·조선·방산·원전 등 주력산업과 반도체를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파운드리’를 제시했다. 이 센터장은 “키 작은 선수가 농구에서 메달을 따기 어렵다면 쇼트트랙처럼 잘할 수 있는 종목을 택해야 한다”며 “제조업과 반도체를 연결해 새로운 게임을 시도해볼만하다”고 주장했다.

은정진/사진=이솔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