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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열며 [현대인의 호(號)와 호시(號詩)]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코너를 열며
이름이 태어나며 받는 것이라면, 호(號)는 살아가며 얻는 것이다.
오랫동안 학자와 문인,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만 여겨져 온 호가 요즘에는 은퇴를 앞두었거나 이미 은퇴한 이들 사이에서 다시 불리고 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옛 동료를 ‘부장님’이라 부르기도, ‘아무개 씨’라 부르기도 어색할 때, 호는 서로를 높이면서도 정답게 부를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호칭이 되어 준다.
그러나 호의 쓸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를 짓는 것은 지나온 삶과 앞으로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한두 글자에 담아 보는 일이다. 정신없이 떠밀려 온 세월 이쯤에서 비로소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 물음에 오늘의 생각과 정서로 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오래된 문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호가 한 사람의 지향을 가리키는 이정표(里程標)라면, 호시(號詩)는 그 길을 펼쳐 보이는 지도이다. 호의 뜻을 밝히고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는 몇 줄의 시 속에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담긴다. 명함 뒷면에 새겨 두면 처음 만난 이에게 나를 깊이 각인시킬 수 있고, 족보에 올려 두면 후손에게 전하는 마음의 유산이 된다.
언젠가 어떤 이가 호만 있으면 그만이지 호시까지 갖출 까닭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그 물음에 아래의 자작시로 답하였다.
號與號詩(호여호시) 호와 호시
號如寶劍詩如鞘(호여보검시여초) 호가 보검과 같다면 호시는 그 칼집과 같고
號如伊人詩如屋(호여이인시여옥) 호가 그 사람과 같다면 호시는 집과 같나니
若劍無韜人無處(약검무도인무처) 보검이 감출 곳 없고 사람이 머물 곳 없다면
豈云已備所須足(기운이비소수족) 어찌 필요한 것 이미 잘 갖추었다 하겠는가
이 코너에서는 매회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 가운데 한 분의 호와 그 뜻을 풀이한 호시를 소개하고 길지 않은 글로 해설을 덧붙이려고 한다. 독자들에게는 우리 인문 전통의 향기를, 호의 주인에게는 자신의 삶을 다시 비추어 보는 거울을 건네는 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보검에 꼭 맞는 칼집을 마련해 주듯, 한 사람의 호에 꼭 맞는 집 한 채를 지어 드리는 심정으로 첫 문을 연다.
2026년 10월 20일
태헌(太獻) 강성위(姜聲尉) 적음.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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