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에서 수십 년간 한 분야를 파고든 대학교수들이 연구실 밖으로 나오고 있다. 휴머노이드, 양자컴퓨터, 핵융합 등 핵심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업이 불가능한 분야가 많아지면서 교수가 최고경영진으로 변신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는 설명이다.
◇딥테크 기업 만드는 대학 교수들
4일 업계에 따르면 박해원 KAIST 교수는 디든로보틱스에서 최고과학책임자(CSO)를 맡고 있다. 디든로보틱스는 선박에서 용접과 검사를 수행하는 로봇을 제조하는 회사다. 험한 지형을 이동하는 사족보행 로봇의 설계와 제어를 박 교수가 책임지고 있다. 황보제민 KAIST 교수는 라이온로보틱스에서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로봇이 주변 환경에 맞춰 스스로 걷는 기술을 상업화했다. 황보 CEO는 “휴머노이드 같은 분야는 기술 축적이 중요하다”며 “학계에서 오래 연구한 분들을 중심으로 업계가 꾸려지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피지컬 인공지능(AI)이 확산하면서 로봇 분야의 기술 난도가 높아졌다고 분석한다. 로봇 몸체를 제작하는 하드웨어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판단하고 움직임을 결정하는 알고리즘까지 함께 구현해야 하는 만큼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석학의 도움이 필수가 됐다는 설명이다. 김준하 디든로보틱스 대표는 “하드웨어와 알고리즘이 함께 연결된 기술은 따라 하기 어려워 기술적 장벽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컴퓨팅도 교수들이 활약하는 분야 중 하나다. 외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0과 1이 겹쳐 있는 중첩 상태가 무너지는 문제를 실시간으로 해결해야 해서다. KAIST 출신으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양자컴퓨팅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동규 오큐티 대표는 극도로 차갑게 식힌 중성원자를 레이저로 제어하는 방식을 활용 중이다. 김태현 서울대 교수는 전기를 띤 원자를 진공 속에 가두는 이온트랩 방식을 연구한다. 그는 올해 국내 첫 이온트랩 양자컴퓨터 제조기업 트래피온스를 세울 예정이다.
◇정부·대기업 전문가도 창업 전선으로
정부와 기업 출신 기술 전문가들이 딥테크 스타트업을 세운 사례도 적지 않다. 제2대 국가핵융합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등을 지내고 한국형 핵융합로 ‘KSTAR’ 건립을 주도한 이경수 대표가 2023년 인애이블퓨전을 설립했다. 인애이블퓨전은 국내에서 처음 등장한 핵융합 스타트업이다. 이 대표는 인애이블퓨전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AI 분야에선 크래프톤과 삼성전자에서 데이터사이언티스트를 지낸 임정환 모티프 대표가 눈에 띈다. 그는 대규모 AI를 구동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연산을 최적화하는 기술을 내세워 모티프를 설립했다. 모티프는 ‘대한민국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경쟁에 뛰어들면서 유명해졌다. 2차 평가에서 탈락했지만 AI 성능평가 지표 벤치마크에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며 기술력을 증명했다.
업계에선 VC가 기술 구루를 찾는 흐름이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자가 오랜 기간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는 물론 ‘S급’ 연구 인력까지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액셀러레이터(AC)인 블루포인트파트너스의 이용관 대표는 “과거에는 마케팅, 실행력 같은 운영 역량이 기업의 차별화 요소였다면 이제는 양자컴퓨터·소형원자로·휴머노이드처럼 기술적 허들을 넘지 못하면 가치 자체를 만들기 어려운 사업이 많아졌다”며 “결국 혁신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기술과 이를 오랫동안 축적해온 연구자의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