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영화 '서울의 봄'으로 1313만 관객을 모았던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의 신작 '암살자(들)'이 상영과 동시에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개봉 전만 해도 근현대사 대작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극장에 내걸린 직후 사회·정치적 갈등의 중심부로 휩싸인 모양새다. 논란은 단순한 역사적 해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배우 자택 앞 집회 시위, 여론조사 파문, 문화계 전반을 향한 '좌표 찍기'로 확산하고 있다.

◇ '음모론'이 건드린 역사의 역린… 법적 공방으로 번진 쟁점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암살자(들)'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1974년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배후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사법부의 확정 판결 및 공식 사료에 의하면 해당 사건은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의 단독 테러였다.

그러나 영화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 등 정권 내부 극단주의 세력이 사건에 개입했거나 이를 방조·이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보수 진영, 시민단체에서는 "역사적 정설을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급기야 시민단체 신자유연대 등은 제작진과 감독을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논란이 격화되자 온라인 공간에서는 "중국 자본이 투입되어 한국 현대사를 공작·왜곡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마저 급속도로 유포됐다. 이에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측은 "영화는 100% 순수 국내 자본과 펀드로 제작되었으며 중국 자원은 일절 투입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제작진 역시 "실존 인물과 사건에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창작의 산물'로 봐달라"고 호소했으나, 불붙은 논란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인 모양새다.
영화 '서울의 봄' 메인 포스터.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 메인 포스터.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특히 동일한 제작사가 내놓은 전작 '서울의 봄' 개봉 당시와 극단적인 온도차가 났다. 두 작품 모두 실화에 허구를 결합한 극영화 형식을 취했으나, '서울의 봄'이 1313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반면 '암살자(들)'은 암초에 부딪혔다.

이 같은 극명한 반응 차이는 사법부 확정 판결과 역사적 정설의 침해 여부에서 비롯됐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이라는 확정된 역사적 골격을 유지한 채 인물명을 가명으로 바꾸고 밤의 긴박감을 영화적으로 연출해 사건의 본질을 뒤흔들지 않았다. 반면 '암살자(들)'는 사법부와 사료를 통해 결론 난 문세광 단독 범행에 '정권 내부 세력 개입'이라는 음모론적 가설을 전면에 부각했다.

생존 유족의 존재와 한층 민감해진 대중의 팩트 체크 성향도 거부감을 키운 요인이다. 이미 사법적 단죄가 일단락된 12·12 군사반란과 달리, 1974년 피격 사건은 유족이 생존해 있어 명예훼손 등 법적 리스크가 직결되는 구조다. 결국 대비를 선명히 각색하며 역사적 맥락을 직관적으로 수용하게 만든 '서울의 봄'과 달리, '암살자(들)'는 음모론을 재구성하는 연출 기법을 택하면서 '창작인가 왜곡인가'라는 거대한 논란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 국민 10명 중 6명 "역사 왜곡"… 2030세대가 더 거세게 반발
그래픽 = 유채영
그래픽 = 유채영
창작과 왜곡의 경계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냉담함에 가까웠다. 개혁신당 싱크탱크인 개혁연구원이 지난달 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2%가 '암살자(들)'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창작의 자유'라는 응답은 27.6%에 불과해 배 이상 격차를 보였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4.2%로 집계됐다.

특히 연령대별 조사 결과는 기존 정치적 지형과 다른 기형적 양상을 드러냈다. 20대(65.7%)와 30대(73.8%) 등 청년층에서 '역사 왜곡'이라는 답변이 독보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이다. 이는 40대(37.7%)나 50대(37.1%)의 응답률을 압도하는 수치다. 팩트 체크에 민감한 MZ세대가 역사적 사실과 이탈한 영화적 설정에 한층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권의 법적 대응 및 상영금지 가처분 추진에 대해서도 찬성 기류가 우세했다. '과도하다'는 의견이 35.2%에 머문 반면, '적절하다'(25.7%)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31.2%)를 합친 응답은 56.9%로 과반을 넘어섰다. 이번 조사는 무선 임의전화걸기 RDD ARS 방식으로 실시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2%포인트다.

◇ 배우 자택 시위부터 전작 '별점 테러'까지
사진=뉴스1
사진=뉴스1
정치·사회적 갈등은 영화에 참여하거나 언급한 이들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위협으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지난 1일 보수단체 신자유연대 김상진 대표는 SNS를 통해 주연 배우 유해진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건물 사진과 집회 신고서를 기습 공개했다. 오는 3일부터 한 달간 20여 명의 인원과 방송 차량을 동원해 자택 앞 규탄 시위를 벌이겠다는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도로명 주소지 번호가 노출되어 사생활 침해와 신변 위협 논란이 불거졌다.

파장은 같은 제작사의 전작으로까지 확산하는 양상이다. 지난달 30일부터 포털 사이트 내 '서울의 봄' 평점란에는 최하점인 1점을 연달아 부여하는 후기가 폭증했다. 1312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 근현대사 영화의 이정표를 세웠던 '서울의 봄'마저 제작사가 동일하다는 이유로 옥죄기에 시달리는 셈이다. 시장에서는 '암살자(들)' 사태가 유발한 분풀이성 연쇄 테러로 보고 있으나, 구체적인 연관성은 입증되지 않았다.

불똥은 영화 외부 인사들에게도 튀었다. 역사 강사 최태성, 영화평론가 이동진, 유명 리뷰 유튜버들은 악성 댓글 폭주에 시달리다 관련 리뷰 영상을 줄줄이 비공개 조치하거나 삭제했다. 개봉 당시 유명인 42명이 남겼던 추천사도 전면 자취를 감췄다. 유해진과 이민호가 광고 모델로 나선 패스트푸드 브랜드 버거킹 등에는 불매 운동 압박이 이어지며 결국 공식 유튜브 댓글 창이 차단되는 기태까지 포착됐다.

여파는 행사 일정 차질로도 이어졌다. 주연 배우 이민호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액터스 하우스' 행사도 전격 취소됐다. 개봉 2주 차 무대인사에서는 배우 류혜영, 장률, 최유리가 개인 사정을 이유로 무더기 불참을 통보했다. 배급사 측은 "부산국제영화제 야외무대인사(유해진·박해일·이민호 참석)는 변동 없이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결국 취소됐다.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최근 사태와 관련해 관객 및 참석자들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과 야외무대인사 일정을 전면 취소한다"고 전했다.

◇ "영화는 영화일 뿐" vs "팩트의 책임"… 충무로 잔혹사 되풀이되나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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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내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고심이 깊어지는 분위기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가상의 극영화에 법적·정치적 잣대를 대고 자택 앞 시위까지 벌이는 관행이 정착될 경우, 대중문화 전반의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상영관을 나오면서 '보수 진영이나 관련 단체 측에서 거세게 반발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며 "영화 시작 부분에 '사실에 기반한 허구'라는 자막을 명시했으나, 여전히 많은 대중이 기억하고 있는 민감한 근현대사 사건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배후설 제기가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전했다.

이어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서사적 몰입감은 훌륭했고, 제시된 음모론 역시 아주 허무맹랑한 수준은 아니었다"면서도 "멜로 거장인 허진호 감독이 현대사 잔혹사극에 도전하면서 이 정도의 정치·사회적 파급력을 예견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영화적 허구의 영역마저 형사 고발과 불매 운동, 신상 털기로 응징한다면 앞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연출하려는 감독이나 출연하려는 배우는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유족이 생존해 있고 정치적 민감도가 극심한 현대사를 다룰 때는 최소한의 역사적 개연성과 팩트에 대한 중압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도 맞선다. '서울의 봄'으로 한국 현대사 영화의 흥행 가도를 달렸던 제작진이 '암살자(들)'로 거대한 악재를 만난 가운데, 이번 파동이 대중문화계의 가이드라인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관심이 쏠린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