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만 연안에 있는 중동 주요 산유국의 원유 수출량이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전 대비 80%까지 회복됐다. 미군의 호르무즈해협 일대 유조선 호위 작전이 성공하고, 우회 송유관 등을 통한 수출 물량이 늘어난 결과다. 하지만 수요에는 여전히 못 미쳐 국제 유가는 당분간 고공행진할 전망이다.

◇ ‘유조선 갈아타기’가 주효

30일 로이터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글로벌 원자재 데이터 업체 케이플러는 중동 주요 산유국의 이달 원유 수출량이 하루평균 1632만8000배럴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올해 2월 말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시작된 뒤 가장 많은 물량이며 휴전 시기 수출량도 웃돈다. 전쟁 직전 수출량인 하루평균 1951만3000배럴의 83%까지 회복했다.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원유 수출량만 하루평균 971만9000배럴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유조선 환승으로 봉쇄 뚫어…중동 원유수출 80% 회복
수출 회복의 핵심은 위험 구간과 장거리 운송 구간을 분리한 ‘셔틀 운항’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른바 ‘유조선 갈아타기’다. 산유국 정부가 보유한 유조선이 호르무즈해협 안쪽 수출 터미널에서 원유를 싣고 미군의 호위를 받아 해협을 통과한 뒤, 해협 바깥에서 다른 유조선에 원유를 옮겨 싣는 방식이다. 원유를 넘겨받은 배는 최종 수입국으로 향하고, 셔틀 유조선은 걸프 항구로 돌아가 다음 물량을 운송하는 구조다. 이코노미스트는 “언제 있을지 모를 이란의 공격에 부담을 느끼는 민간 선사 유조선을 대신해 산유국 정부가 원유를 실어 나르는 구조”라며 “선박 간 환적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들어 지속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유조선 택갈이’도 동원됐다. 사우디 국영 해운사 바흐리는 최근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11척의 국적을 사우디에서 라이베리아로 바꾸고 배 이름은 ‘샤인’이라는 공통 명칭이 들어가도록 바꿨다.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이란의 표적 공격을 피할 수 있다.

호르무즈해협을 완전히 우회하는 수송로도 다시 가동됐다. UAE는 송유관으로 오만만 푸자이라항까지 원유를 보내고, 사우디는 동부 유전지대에서 서쪽 홍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동서 송유관을 이용한다. 후티반군 공격으로 홍해 우회로 이용에 어려움을 겪은 사우디 아람코는 홍해 연안 얀부항을 통해 원유 운송을 재개했다고 최근 고객사에 통보했다.

◇ 궁지에 몰린 이란의 대응은

원유 수출량 회복 소식은 유가를 끌어내렸다. 전날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 가격은 3.5% 하락한 배럴당 89.38달러, 브렌트유 선물은 2.6% 내린 102.59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수출 증가세에도 고유가가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공급이 늘긴 했지만 중동 원유 수출량은 전쟁 직전보다 하루 약 320만 배럴 적다.

그동안 소진한 재고를 채우기 위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세계 석유 재고는 8월에만 9500만 배럴 줄었다. 2월 이후 누적 감소량은 5억700만 배럴에 달했다.

중국의 원유 구매 재개도 국제 유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원유 구매를 40% 가까이 줄인 중국 정유사들은 최근 다시 원유 확보에 나섰다. 항공유와 경유, 휘발유 재고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데 따른 대응이다.

더 큰 변수는 이란의 대응이다. 중동 산유국의 원유 수출 물량이 회복되면서 미국과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레버리지인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재개된 미국의 해상 봉쇄로 이란산 원유 수출은 사실상 막혔다. 이란은 미국 봉쇄선 바깥 선박에 미리 실어둔 원유를 판매하며 버티고 있지만 이마저 곧 바닥날 전망이다.

이란이 세계 에너지 공급망을 흔들기 위해 산유국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사남 바킬 중동 담당 국장은 “이란이 지금의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큰 충돌을 시작하면 폭발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