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무릎 꿇리고 SNS에 실명 공개…'갑질'에 칼 빼들었다 [도쿄나우]
2013년 일본 삿포로의 의류점 ‘패션센터 시마무라’에서 한 여성 고객이 직원 2명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도게자’를 강요했다. 고객은 이 장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직원들의 실명과 함께 트위터에 올렸다. 결국 이 여성은 강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악성 고객의 ‘갑질’ 문제가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가 이른바 ‘카스하라(カスハラ)’와의 전쟁에 나선다. 오랫동안 서비스업에 뿌리내린 ‘고객은 신’이라는 문화를 그대로 두고서는 심각한 인력난 속에서 종업원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일본에서는 오는 10월 개정 노동시책종합추진법이 시행된다. 이에 따라 기업은 고객의 폭언과 위협, 과도한 요구 등으로부터 종업원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법은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 종업원의 근무환경을 해치는 고객의 언행을 ‘카스하라’로 정의했다. 기업은 카스하라 대응 방침을 종업원들에게 알리고 피해 직원이 상담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폭력이나 위협적인 언행뿐 아니라 종업원을 무단 촬영하거나 해당 영상을 SNS에 올리는 행위, 장시간 매장에 머물면서 반복적으로 항의하는 행위 등도 대표적인 카스하라 사례로 제시했다.

일본에서 카스하라가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떠오른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특히 시마무라 사건처럼 점원에게 도게자를 강요하거나 그 모습을 촬영해 인터넷에 공개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단순한 ‘악성 민원’을 넘어 종업원에 대한 괴롭힘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소매·외식업 종사자가 많이 가입한 노동조합 UA젠센은 2017년 카스하라 대응 지침을 만들었다. 이후 카스하라는 직장 내 괴롭힘인 ‘파워하라’, 성희롱인 ‘세쿠하라’에 이어 일본 사회의 ‘제3의 괴롭힘’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에는 도쿄도가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선도적으로 카스하라를 금지하는 조례도 시행했다.

기업들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식품 슈퍼마켓 라이프코퍼레이션과 벨크는 지난해부터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원들의 명찰에서 실명 표기를 없앴다. 악성 고객이 직원 이름을 알아낸 뒤 SNS에서 신상을 추적하거나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JR그룹과 주요 민간 철도회사도 지난해부터 역 구내 등에 카스하라 방지 포스터를 공동으로 게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고객의 불만이 제기되면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최근에는 폭언이나 부당한 요구에는 조직 차원에서 대응한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다만 이번 법이 악성 고객에게 직접 처벌이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초점은 기업이 종업원을 보호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다. 실제 현장에서 카스하라를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는 기업들의 대응 강도에 달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제도 변화는 일본 서비스업의 전통적인 고객관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오모테나시(극진한 환대)’를 중시해왔다. 고객의 요구에 최대한 응하는 것을 좋은 서비스로 여기다 보니 종업원이 부당한 요구까지 참고 견디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오캬쿠사마와 가미사마데스(고객은 신입니다)’라는 표현은 이런 문화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고객 만족을 최우선시하는 문화가 높은 서비스 수준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동시에 과도한 요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서비스업 인력난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점도 일본 정부와 기업이 태도를 바꾸게 된 배경이다. 악성 고객 한 명을 붙잡기 위해 직원에게 무조건 참을 것을 요구하다가는 결국 종업원이 직장을 떠나 서비스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수십 년간 당연시돼 온 ‘고객은 신’이라는 원칙이 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이제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도 기업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법제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