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굿은 비는 자에게 복을 내려주는 수동적인 형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서울굿에선 '무감서기'라는 특이한 절차가 있다. 굿을 요청한 자가 직접 굿판에 뛰어들어 제 몸을 내던지며 즉흥 춤을 춘다. 복이란 가만히 앉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쟁취해야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1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는 즉흥성과 주체적 구원의 의미를 무대 위로 끌어올려 인간의 삶과 고통, 치유의 서사를 다섯가지 색깔의 변주로 풀어냈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의 마지막 장.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의 마지막 장. 세종문화회관 제공
1장 '흑(黑)의 눈물'은 바닥을 기며, 흐느적거리는 군무가 주를 이룬다. 검정으로 얼굴마저 가린 무용수들의 모습은 까맣게 타버린 숯, 절망의 최극단을 연상시켰다. 이어지는 2장 '황(黃)과 청(靑)의 눈물'에서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맥동하는 삶의 활력이 황색 남성 군무로 나타나고, 이를 청색이 차분히 가라앉히며 얌전한 2인무로 연결된다. 보색에 가까운 청과 황의 인상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이 조붓한 춤사위 때문이다. 똑같은 동작이 아닌 저마다의 사연을 주고받는 대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황의 눈물, 청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황의 눈물, 청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강렬한 잔상을 남긴 것은 3장 '적(赤)의 눈물'이다. 1장에서 까맣게 타버렸던 숯에 다시 불씨가 붙듯, 적색과 흑색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쉼없이 폭발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우리가 접하는 무당의 춤처럼 현란함과 맥동이 끊임없이 관객의 시청각을 두드렸다.

분위기를 반전하는 건 4장 '백(白)의 눈물'. 창호지에 어슴푸레 비친 달빛과 같은 조명을 받은 솔로 무용수(기무간)가 팔다리를 들어올렸다. 망자의 넋을 달래는 종이 돈 '지전'을 의인화했다는 기무간의 독무와 소리꾼의 아련한 소리가 어우러졌다. 흰 옷자락을 공중에 흩뿌리며 회전하는 기무간의 춤사위에는 신이나 남에게 기대지 않고 제 힘으로 삶의 한을 씻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실려 있었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적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적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마지막 장 '무감서기'에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뚜렷이 드러났다. 성별의 구분이 없는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은 단 한 명도 같은 춤을 추지 않는다. 의상의 날림과 흐름, 속도가 무용수 개개인의 손끝에 따라 다르게 피어난다. 특히 겹겹이 입고 있던 의상을 벗어던지며 이어지는 마지막 즉흥 춤사위는 압권. 저마다 춤을 멈추는 타이밍이 다른 이 연출은, 훈련된 칼군무를 넘어 관객 각자가 자신의 삶 속으로 뛰어들도록 독려하는 서울굿의 즉흥성을 표현했다. 3000석 대극장 무대를 무용이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걱정한 것은 기우였다. 민천홍 의상디자이너가 의도한 5겹의 의상도 하나하나 복을 만들어가는 치성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했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백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무감서기' 중 '백의 눈물' 세종문화회관 제공
대극장을 염두해 만든, 신작에 대한 연출적 욕심이 가져온 아쉬움도 남는다. 인트로와 결말부, 무대 위 스크린에 짧은 영상이 등장한다. 현대인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시네마틱한 효과
를 의도했다는 윤혜정 예술감독의 설명이 있었지만 공감하기 어려웠다. 무대 마지막, 스크린에 현실적 모습을 직접적으로 노출해서일지 무용수들이 애써 쌓아올린 예술적 여운과 숭고한 구원, 환상을 막바로 끊어버리는 역효과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움직여 복을 가져오는 '무감서기'의 정신을 오방색의 시각적 활용과 무용수들의 기량으로 증명해낸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무대 위 허물을 벗듯 옷을 던져버리고 저마다의 속도로 춤을 마무리짓던 무용수들의 모습은 빠알간 숯불처럼 관객의 마음을 덥혀줄 것 같다. 공연은 1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