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경망처리장치(NPU) 업계가 ‘엔비디아 생태계 편입’이라는 실리와 ‘소버린 인공지능(AI)’이라는 명분을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쥔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출 대안으로 떠오른 국내 NPU 회사에 추론 칩 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오히려 손을 내밀고 있어서다. 독자 노선을 지킬지, 엔비디아와 손잡고 몸집을 키울지에 따라 정부가 추진 중인 국산 AI 반도체 육성 방향도 달라질 전망이다.

◇대항마에서 협력관계로?

31일 업계에 따르면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미국 엔비디아 본사에서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논의엔 기술 제휴와 투자, 인수 등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리벨리온 관계자는 “두 CEO가 회동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

두 인사의 회동 소식은 국내 AI 업계에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리벨리온은 국산 AI반도체의 ‘맏형’이다. 리벨리온이 생산하는 NPU는 엔비디아가 장악한 GPU보다 전력 효율과 가성비가 높은 대체재로 주목받는다. 정부도 지난 3월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리벨리온에 2500억원을 투자했다.

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은 엔비디아의 대항마를 자처하며 GPU 수요를 대체할 수 있다는 포지션을 취해왔다”며 “미국 종속에 대한 우려가 큰 유럽과 중동의 소버린 AI 수요를 흡수하겠다는 큰 청사진도 마련했다”고 했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2024년 리벨리온에 200억원을 전략적으로 투자했고, 리벨리온도 사우디 수도인 리야드에 지사를 세웠다.
엔비디아 손잡아야 하나…K-AI칩 '딜레마'

◇NPU 흡수하려는 엔비디아

리벨리온이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고민하는 것은 성장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NPU 시장이 커지고 있지만, 리벨리온의 지난해 매출은 여전히 300억원대에 머물렀다. 글로벌 AI 생태계를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와 협력하면 최대 시장인 미국 데이터센터 진출 가능성도 커진다. 실제 엔비디아는 추론 칩 스타트업인 그록을 지난해 말 사실상 인수하고 이달 24일 그록3 추론 전용칩을 베라루빈 플랫폼에 포함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를 장착한 리벨100 NPU를 출시하고 본격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리벨리온으로선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란 얘기다.

소버린 AI 수요에만 기대서는 리벨리온이 원하는 만큼의 ‘글로벌 스케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민 요소다. 미국의 세레브라스와 에치드 등 추론 칩 경쟁자는 기업 가치를 각각 60조원, 30조원 안팎으로 인정받고 있다. 3조4000억원인 리벨리온과는 큰 차이다.

리벨리온이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결정하면 다른 K-NPU 업체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퓨리오사AI는 미국 메타로부터 받은 8억달러(약 1조1000억원)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리벨리온이 엔비디아를 선택하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퓨리오사AI 등 다른 NPU 업체도 움직일 가능성이 생긴다. 국민성장펀드의 대규모 투자를 받은 만큼 엔비디아에 인수되는 길을 택하기는 어렵지 않겠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