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은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격려하고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발전해나가길 바랍니다.”

27일 서울 몬드리안호텔에서 열린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에서 수전 재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예술감독이 한국 무용수들에게 건넨 말이다. 세계 정상급 발레단을 이끄는 리더들은 한국 무용수들의 탄탄한 기본기와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제는 ‘더 잘하기’만을 좇기보다 자신만의 예술성과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 기자회견에서 사샤 라데츠키 ABT 스튜디오 컴퍼니 예술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 기자회견에서 사샤 라데츠키 ABT 스튜디오 컴퍼니 예술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세계 주요 발레단의 전현직 예술감독 8명이 한자리에 모인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이 27일 개막했다. 이들은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무용수들의 성취를 짚는 한편, 한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논의했다.

이번 행사는 30년동안 수백명의 무용수를 배출한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가 마련했다.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 주요 발레단에서 잇따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해외 발레단을 실제로 이끄는 리더들을 서울에 초청해 한국 발레의 경쟁력과 과제를 직접 듣는 데 주안점을 뒀다.

세계 발레계가 바라보는 한국 무용수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기본기와 성실함이다. 미코 니시넨 보스턴발레단 예술감독은 “현재 7명의 한국인 무용수와 함께하고 있다”며 “한국인 무용수들은 고전 발레의 기본기가 탄탄하게 갖춰져 있고 음악에도 잘 반응한다”고 평가했다.

함께 자리한 무용수 김석주를 보며 “바로 무대에 투입할 수 있는, 준비된 인재”라고 덧붙였다. 테드 브랜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전임 예술감독 역시 한국 무용수의 강점으로 ‘의지’를 꼽았다. 그는 최영규 수석무용수를 예로 들며 “한국인 특유의 굴하지 않는 의지와 근면함을 봤다”고 말했다.
제1회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에 참석한 글로벌 발레단 전현직 예술감독과 김선희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뒷줄 가운데), 한예종이 배출한 무용수들(앞줄 왼쪽부터 김석주, 전민철, 박선미, 한성우)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제1회 2026 서울 글로벌 발레포럼에 참석한 글로벌 발레단 전현직 예술감독과 김선희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뒷줄 가운데), 한예종이 배출한 무용수들(앞줄 왼쪽부터 김석주, 전민철, 박선미, 한성우)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 기본기를 중시하는 교육 시스템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한국인 무용수들은 유럽과 미국 주요 발레단에서 수석·솔리스트급으로 꾸준히 성장하며 존재감을 키워왔다. 그러나 세계의 리더들이 한국 발레계에서 주목한 것은 테크닉뿐만은 아니었다.

재피 ABT 예술감독은 “발레는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을 담아야 하는 아트폼”이라며 “한국 무용수들이 퍼포먼스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잉그리드 로렌첸 노르웨이국립발레단 예술감독도 한국 무용수들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고영서 등 한국 무용수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발레 리더들이 한국 발레에 던진 조언은 ‘더 열심히 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국 무용수들을 성장시킨 성실함과 완벽주의에서 한 걸음 벗어나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이미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무용수들을 배출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이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가 과제로 제시됐다. 나아가 무용수의 창의성을 뒷받침할 안무가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도 한국 발레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혔다.

재피 감독은 젊은 무용수들이 다양한 안무가와 작품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젊은 무용수들이 글로벌한 안무와 안무가에 자주 노출돼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고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안무 창작 능력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 무용수들에게서 나타나는 과도한 자기검열과 완벽주의에 대해서도 짚었다. 재피 감독은 “겸손한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국적의 무용수보다) 한국인 무용수들은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찾으려 한다”며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작은 단계라도 달성했다면 즐기고 축하하는 순간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무용수의 성장을 위해서는 실패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잔디를 계속 깎으면서 잘 자라라고 하면 안 된다”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여유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한국 발레 교육이 ‘정확하게, 완벽하게, 빠르게’ 무대에 올리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무용수가 자신의 개성과 예술적 언어를 발견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의미다. 기본기를 갖춘 무용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결국 각자의 경험과 해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수들도 이에 공감했다.

지난 7월 15일 ABT 수석무용수로 승격한 박선미는 컴퍼니에 처음 들어갔을 당시 다양한 장르를 접했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처음 컴퍼니에 갔을 때 재즈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접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다”며 “후배들이 학교에 있을 때 더 많은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춤을 오래 추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한 전민철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사랑의 맹세라는 마임을 하더라도 역할마다 가진 차이점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러시아에서 새롭게 배웠다”며 “기본기를 활용해 프로 무대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이번 포럼이 일회성 행사를 넘어 한국 발레가 세계 발레계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장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브랜슨 전 감독은 “계속 발전을 거듭하는 발레포럼이 되길 바란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발레의 발전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발레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까지 논의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포럼은 30일까지 이어진다. 예술감독들의 마스터 클래스를 비롯해 전민철, 박선미 등이 등장하는 갈라 공연 '한 여름 밤의 발레 축제'도 이 기간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