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킬로그램짜리 거대한 요거트 / 사진. ©신예희
5킬로그램짜리 거대한 요거트 / 사진. ©신예희
화려한 궁전이라던가 유서 깊은 사원,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 못지않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 있다. 바로 대형 마트 구경이다. 하지만 마트의 모든 코너가 다 재미난 건 아닌데, 이젠 생활용품이든 의류든 화장품이든 세계 곳곳이 점점 비슷비슷해지고 있어서다. 아예 똑같은 글로벌 브랜드 제품도 많고. 그러니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건 콕 집어 식품 매장뿐이다. 지역의 특색과 계절감과 트렌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두부 같지만 치즈 덩어리다 / 사진. ©신예희
두부 같지만 치즈 덩어리다 / 사진. ©신예희
특히 튀르키예의 마트 식품 매장은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기분이 든다. 기름진 땅에 날씨도 좋아 농축수산물의 생산량과 질이 모두 풍부하다. 햇볕 듬뿍 받고 자란 다디단 과일과 진한 맛의 채소도 좋고, 전 세계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헤이즐넛과 피스타치오 등 견과류 맛도 굉장하다.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홍찻잎이 산지별로 분류되어 차곡차곡 정렬한 모습도 장관이다. 빵과 디저트도 산처럼 쌓여있고, 올리브오일도 어찌나 맛 좋고 저렴한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부럽다, 부러워. 마음 같아선 귀국길에 가방 가득 채워 가고 싶다.

무엇보다 튀르키예는 유제품의 질이 좋다. 가장 기본인 흰 우유를 한 모금만 마셔봐도 어라, 하며 놀라게 된다. 우리의 것과 비교하자면 좀 더 야성적인 맛이랄까. 그러니 버터와 치즈, 요거트 등도 모두 진한 맛이 날 수밖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버터인데, 포장이 워낙 독특하다. 세로로 길게 자른 버터 덩어리의 아래쪽 1/3은 둥근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고, 나머지 윗부분은 진한 노란빛 몸체를 노출한 채 투명한 뚜껑을 가볍게 덮어놓았다.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똑 닮았다. 이렇게 포장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어차피 금방 먹을 거라 칼로 숭덩숭덩 썰기 좋게 한 거라나. 자그마한 버터 한 팩을 일 년 가까이 지나도록 다 먹지 못하는 나로선 놀랄 뿐이다.
독특한 버터 포장 / 사진. ©신예희
독특한 버터 포장 / 사진. ©신예희
[좌] 빵과 꿀, 카이막은 최강의 조합이다  [우] 마트 냉장고에서 만난 반가운 카이막 / 사진. ©신예희
[좌] 빵과 꿀, 카이막은 최강의 조합이다 [우] 마트 냉장고에서 만난 반가운 카이막 / 사진. ©신예희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인의 무한 지지를 받는 카이막(kaymak)도 빼놓을 수 없다. 지방 함량이 높은 우유를 약한 불에 올려 오랫동안 살살 데운 후 완전히 식혀서 윗부분의 지방 부분만 떠낸 것이다. 처음 카이막을 맛보았을 땐 당연히 버터라고 생각해서, 대체 무슨 버터가 이렇게 하얗고 부드럽냐며 놀라워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이리저리 발로 뛴 끝에 이름을 알아내고선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귀국할 때까지 매일같이 카이막을 사 먹었다. 이탈리아의 모차렐라 치즈처럼, 카이막도 전통적으론 물소 젖을 쓴다. 우유보다 지방 함량이 높아 더 고소하고 더 풍성한 맛이다. 역시 칼로리는 맛의 척도다.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걸 그날그날 파는 게 당연히 최고로 맛있지만, 마트나 편의점에서 파는 대량 생산된 카이막도 충분히 좋다. 특히 꿀과 궁합이 잘 맞는데, 튀르키예의 꿀맛이 또 그렇게 깊고 진하다. 하긴, 어떤 식재료든 안 그럴까. 부러울 뿐이다.
[좌] 아침식사에 곁들이는 다양한 형태의 치즈  [우] 무한 시식을 권해주시는 치즈 가게 사장님 / 사진. ©신예희
[좌] 아침식사에 곁들이는 다양한 형태의 치즈 [우] 무한 시식을 권해주시는 치즈 가게 사장님 / 사진. ©신예희
가장 흔히 먹는 치즈는 베야즈 페이니르(Beyaz peynir)로, 주로 양젖과 우유로 만든다. 두부처럼 하얗고 네모나고, 쫀득하다기보단 푸슬푸슬하고, 새큼한 맛이 강하다. 그리스의 대표 치즈인 페타(φέτα)와는 재료도 생김새도 맛도 아주 흡사한데, 그걸 입 밖에 내면 튀르키예 사람들은 자기네가 원조라며 몹시 정색한다. 튀르키예와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에도 역시 쌍둥이처럼 꼭 닮은 시레네(Сирене) 치즈가 있고, 역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싸움 나기 좋다. 세 나라 사이의 지배, 피지배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그런데 진짜 쟁점은 따로 있다. 요거트다. 이 세 나라, 일명 요거트 3국은 누가 요거트의 원조이냐는 문제에 무척 예민하다. 나는 어렸을 적에 보았던 모 요거트 브랜드 광고로 인해 불가리아가 원조일 거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다가, 어른이 되어선 그릭 요거트가 워낙 널리 알려졌으니 그리스가 진짜 원조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얘길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했다가 크게 혼난 이후론 되도록 이 주제는 회피하는 중이다.
15킬로그램의 요거트는 그나마 작아 보인다 / 사진. ©신예희
15킬로그램의 요거트는 그나마 작아 보인다 / 사진. ©신예희
확실한 건, 튀르키예의 유제품 중 최고의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요거트라는 거다. 요우르트(Yoğurt)라고 한다. 마트나 편의점 등에선 5킬로그램들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처음엔 요거트라는 생각은 아예 못 했고, 페인트통인 줄 알았다. 대체 얼마나 많이 먹길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개인이 이 큰 걸 사는 걸까? 좀 작은 걸로는 3킬로그램과 1.5킬로그램짜리도 있지만 그 역시 나 같은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나마 접근할만한 게 500그램짜리다. 한국에서였다면 일주일은 두고 먹을 용량이지만 튀르키예 마트에서 보니 손톱만큼 작아 보인다.

요우르트는 걸쭉하고, 진하고, 새큼하고, 단맛은 전혀 없다. 우리가 아는 플레인 요거트 맛이다. 그냥 먹기도 하지만 필요한 만큼 물기를 빼서 먹기도 하는데, 그렇게 만든걸 쉬즈메(süzme) 요우르트라고 한다. 옛날엔 면 보자기에 요거트를 가득 담아 부엌 싱크대 수도꼭지에 매달아선 밤새도록 물기를 뺐다는데, 이젠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다. 쉬즈메는 튀르키예 요리에 가장 널리 쓰이는 형태다.

좀 더 묵직하고 고소한 카이마클르(Kaymaklı) 요우르트도 매력 있다. 뚜껑을 열어보면 윗면에 지방층이 껍질처럼 덮여있다. 이건 요리에 쓰기보단 꿀과 잼, 과일, 견과류 등을 얹어 후식으로 즐기기 좋다. 한편 라브네(Labneh)도 꼭 맛봐야 하는데, 요우르트의 물기를 쪽 빼고 간해서 좀 더 숙성한 거라 엄밀히 말하면 치즈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치즈처럼 발효취가 강하진 않아, 눈 감고 먹으면 간이 간간이 밴 요거트 같다. 빵에 두껍게 발라먹으면 정말 맛있다. 기본 요우르트와 쉬즈메, 카이마클르, 라브네, 이 네 가지는 튀르키예를 여행할 땐 하나씩 사서 비교해 보자. 똑같은 우유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유제품이 파생된다니 감탄스럽다.
다양한 요거트를 비교하며 먹는 즐거움이 있다 / 사진. ©신예희
다양한 요거트를 비교하며 먹는 즐거움이 있다 / 사진. ©신예희
앞서 이야기한 요거트 3국 모두 요리의 주요 재료로 요거트를 널리 활용한다. 오히려 간식이나 후식으로 먹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드물 정도다. 온갖 고기를 양념해 구운 케밥에도 듬뿍, 토마토와 가지 요리에도 듬뿍, 생선구이에도 듬뿍 곁들인다. 그러잖아도 맛있는 음식이 더욱 부드러워지고 깊어지며 풍부해진다. 포근한 이불을 덮는 느낌이랄까. 다양한 수프에도 요거트를 넣어 함께 끓이면 특유의 새큼한 맛은 줄어들고 국물 농도가 진해진다. 속이 한결 편안해져, 보양식을 먹는 기분도 든다.
묽게 만든 요거트에 채썬 오이를 넣은 차갑고 산뜻한 수프 / 사진. ©신예희
묽게 만든 요거트에 채썬 오이를 넣은 차갑고 산뜻한 수프 / 사진. ©신예희
만두와 비슷한 만트에 따끈한 마늘 요거트 소스를 듬뿍 얹는다 / 사진. ©신예희
만두와 비슷한 만트에 따끈한 마늘 요거트 소스를 듬뿍 얹는다 / 사진. ©신예희
그렇게 어지간한 식재료와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와중에 그래도 최고의 궁합을 꼽는다면 역시 양고기겠다. 양고기의 매력이자 허들이기도 한 특유의 강한 풍미가 요거트와 만나면 누린내와 잡내는 덮이고 육향은 오히려 살아나니 신기하다. 이 놀라운 조화를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요리는 이스켄데르 케밥(İskender kebap)이다. 이스탄불에서 페리를 타고 2시간이면 도착하는 아름다운 역사 도시 부르사의 명물 요리인데, 19세기 말에 이스켄데르라는 이름의 요리사가 개발한 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이젠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되었다. 얇게 포 뜬 양고기를 꼬치에 차곡차곡 꿰어 쌓은 후 회전시키며 굽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얇게 저며서 두툼하고 쫄깃한 피데 빵 위에 넉넉히 얹는다. 그 위에 그윽한 맛의 토마토소스를 한 국자 뿌리고, 요거트 한 덩어리를 옆에 놓아준다.
순두부 같은 요거트 덩어리를 곁들인 이스켄데르 케밥 / 사진. ©신예희
순두부 같은 요거트 덩어리를 곁들인 이스켄데르 케밥 / 사진. ©신예희
휴대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으면 곧 직원이 프라이팬을 들고 와 바글바글 끓는 버터를 접시 위에 착 부어준다. 소리와 향기가 굉장하다. 처음엔 이 퍼포먼스가 인기의 비결인가 싶었는데, 소스를 듬뿍 머금은 고기와 빵, 요거트를 크게 한입에 넣고 씹어보곤 어이구, 하며 놀랐다. 퍼포먼스 따위 없어도 맛으로만 충분히 전국을 제패할 만하다. 모르고 봤으면 순두부인 줄 알 정도로 탱글탱글하고 묵직한 요거트가 접시 위의 재료를 하나로 품어준다. 이렇게까지 잘 어울릴 줄이야.
끓는 버터 퍼포먼스 향기가 아주 좋다 / 사진. ©신예희
끓는 버터 퍼포먼스 향기가 아주 좋다 / 사진. ©신예희
[좌] 빵집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아이란  [우] 민트맛, 매운맛, 레몬맛 등 다양한 아이란이 있다 / 사진. ©신예희
[좌] 빵집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아이란 [우] 민트맛, 매운맛, 레몬맛 등 다양한 아이란이 있다 / 사진. ©신예희
그런데 튀르키예 사람들이 요거트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자주 먹는(마시는) 유제품이 있다. 아이란(Ayran)이다. 요거트로 만든 음료이니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달콤하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시나 틀렸다. 요거트에 물을 섞어 꿀꺽꿀꺽 들이키기 좋은 농도로 만들고 소금을 넉넉히 탄 거다. 그러니 첫인상은 조금 황당할 수 있는데, 익숙해지면 매일 마시고 싶어지는 희한한 매력이 있다.

특히 튀르키예의 가장 흔한 아침 식사 메뉴인 뵤렉과 아이란의 궁합은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기름지고 바삭한 페이스트리를 크게 베어 물고 새큼 짭짤한 아이란을 마시면 버터 향기는 더욱 강해지고 느끼한 맛은 사르르 사라진다. 전체적인 간도 딱 맞는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지? 오두방정 떨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모든 테이블에 아이란이 놓여있다.

그렇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아이란을 정말 좋아한다. 얇고 넓적한 밀전병 같은 빵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돌돌 말아 먹는 두룸 케밥이든, 즉석에서 굽거나 쪄서 소금을 술술 뿌려주는 노점의 샛노란 옥수수든, 항구에 배를 정박해 놓고 고등어를 구워 에크멕 빵에 끼워주는 고등어 케밥이든, 뭘 먹든지 아이란은 기본이다. 보통은 대량 생산된 걸 주지만, 직접 만드는 식당도 있다. 주인의 손맛에 따라 농도도 염도도 조금씩 달라서 은근히 기대된다. 물 대신 탄산수를 섞은 아이란도 독특하다.
수제 아이란을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식당 / 사진. ©신예희
수제 아이란을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식당 / 사진. ©신예희
오랫동안 튀르키예를 여행하다 보니 귀국해서도 자연스럽게 유제품을 자주 찾게 되었고, 특히 요거트 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이란도 직접 만들어 보았고, 무슨 음식이든 일단 요거트를 곁들여보는 버릇도 생겼다. 물기를 잘 뺀 요거트는 의외로 신김치와 잘 맞는다. 특히 팍 익은 오이소박이와 궁합이 괜찮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자연스레 예전처럼 과일과 꿀을 넣어 달콤하게 먹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튀르키예에선 튀르키예식으로, 한국에선 한국식으로 먹는 게 역시 제일인 모양이다. 다음번 여행에서 또 제대로 즐겨봐야겠다.
아이란이 올라간 디저트 / 사진. ©신예희
아이란이 올라간 디저트 / 사진. ©신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