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매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1만 원대 와인, '소블'이라는 약칭으로 쪼그라든 이름. 오랫동안 대한민국 와인 시장의 왕좌를 지키던 레드 와인의 점유율이 고꾸라지는 사이, 그 빈자리를 가장 거침없이 채운 것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었다. 수입량이 폭증하며 일상의 데일리 주류로 안착한 이 현상은 주류 문화의 판도를 바꿀 만큼 경쾌했다. 소블과 함께라면 복잡한 생산지나 떼루아, 테이스팅 노트에 대한 이해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차갑게 칠링해 퇴근길 배달 음식 곁에 툭, 혹은 한강 변의 돗자리 위에 툭하고 놓아두면 그만이다.
만원짜리 와인의 반전…소비뇽블랑에선 당신이 사랑하는 향수 냄새가 난다 [김태형의 향수 B-side]
와인의 경직된 격식을 허물고 음료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유연함은 분명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무릇 장벽이 터무니없이 낮아질 때, 감각은 되레 깊어지기를 멈춘다. 무언가를 가볍게 소비하기 편해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則爲眞愛)”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은 조선 후기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위와 같은 글에서 비롯되었다.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좋아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소비뇽 블랑을 좋아하고 있는가?

국내 화이트 와인 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소비뇽 블랑과 샤르도네(Chardonnay)는 미학적 스타일과 양조 체계, 그리고 소비자가 체감하는 관능적 특성에서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두 품종에 대한 한국 대중의 선호도는 각 품종이 지닌 고유의 특성에 기반한다. 샤르도네는 와인 메이커의 양조 방식에 따라 변주 가능성이 큰 품종으로, 오크통 숙성을 통해 복합적인 아로마와 풍부한 질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소비뇽 블랑은 포도 본연의 신선함과 과실미를 살리기 위해 대부분 스틸 탱크에서 발효 및 숙성된다. 이로 인해 선명한 열대 과일 향과 식물성 아로마가 극대화된다.

결국 소비뇽 블랑에 매료되었다고 믿었던 것 역시 향기 때문이었다. 조향의 세계에서 향을 다루는 근간은 단연 원료에 있으며, 특히 천연 향료를 자신의 감각으로 체화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작업은 그 원료를 구성하는 화학적 성분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와인에 있어서는 품종이 바로 그러하다. 이제 소비뇽 블랑을 향적으로 해체하고, 그것이 향수와 어떠한 접점으로 이어지는지 짚어볼 시간이다.
뉴질랜드 소블. [좌측부터] 클라우드 베이, 오이스터 베이, 빌라마리아
뉴질랜드 소블. [좌측부터] 클라우드 베이, 오이스터 베이, 빌라마리아
사실 '소블'이라는 약칭을 떠올릴 때 곧바로 그려지는 맛과 향은 십중팔구 뉴질랜드 남섬 북단, 말보로(Marlborough)산 와인의 그것이다. 코끝을 때리는 자몽과 폭발적인 열대 과실 아로마, 이 풍미의 이면에는 입체적인 테루아의 마법이 작동하고 있다. 마법의 첫 번째 주역은 남반구 특유의 강력한 자외선이다. 오존층이 얇은 남반구의 자외선은 포도나무 세포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가한다. 이때 포도나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포도 껍질 속에 항산화 물질인 아미노산 전구체들을 집적시킨다. 여기에 밤이 되면 남극 방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해풍이 더해져, 포도나무가 낮 동안 합성해 둔 아로마의 씨앗들이 열로 인해 파괴되는 것을 막아낸다.

그러나 포도즙 자체는 알코올 발효 전까지 아무런 향을 내지 않는 무향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 감춰진 향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양조 과정에서의 생화학적 작용이다. 효소가 포도즙 속 분자들을 분해하는 하면 마침내 티올 계열(Sulfur, -SH) 향 분자들이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황 원자를 핵심 구조로 품고 있는 이 분자들이 바로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향기를 내는 주인공이다. 그 중 3MH(3-mercaptohexan-1-ol)는 갓 짜낸 자몽 과즙과 패션프루트의 싱그러운 아로마를 형성하고, 3MH가 발효되며 탄생하는 분자인 3MHA(3-mercaptohexyl acetate)는 한층 달콤하고 화려한 패션프루트 과육, 망고, 구아바의 아열대 과즙 향을 더한다.

소비뇽 블랑에서 아른거리는 티올의 실루엣은 조향사의 팔레트 안에서 세 가지 핵심 원료를 통해 재현된다. 첫 번째는 자몽, 즉 그레이프프루트 오일(Grapefruit Oil)이다. 자몽은 시트러스 계열 중에서도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극미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그레이프프루트 메르캅탄(Grapefruit Mercaptan)이라는 유황계 분자 때문이다. 단순한 상쾌함에 그치지 않고 찌르는 듯이 전해지는 쌉싸름함은 소비뇽 블랑의 한 모금 머금었을 때의 청량감을 닮았다.
Bourgeon Cassis
Bourgeon Cassis
두 번째는 카시스 버드 아브솔루트(Cassis Bourgeon Absolute)다. 블랙커런트의 봉오리에서 추출하는 이 천연 향료는 조향계에서 가장 고혹한 원료 중 하나이다. 황 성분을 고농도로 품고 있어 원액 상태에서는 고양이 오줌처럼 찌릿한 악취를 피워내지만, 처방에 소량 사용되는 경우 매혹적인 과즙미와 함께 으깬 잎사귀나 줄기의 향으로 변모한다.

마지막은 옥산(Oxane)이라 불리는 합성 향료이다. 황 고리를 품은 이 합성 분자는 카시스 버드의 식물성 향기에 잘 익은 열대 과육이 겹쳐진 복합적인 향기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1974년 해당 분자를 최초로 합성해 낸 글로벌 향료 회사 퍼메니쉬(Firmenich)는 이를 토대로 과일 향을 강조한 조합 향료인 카시스 345 시리즈를 개발하였는데, 수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유명 향수들의 처방에 사용되고 있다.
Diptyque - L'ombre_Dans_L'eau
Diptyque - L'ombre_Dans_L'eau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 Synthetic Jungle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 Synthetic Jungle
그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예시는 딥티크(Diptyque)의 롬브르 단 로(L’Ombre dans L’Eau)다. 1983년 조향사 세르주 칼루긴(Serge Kalouguine)이 탄생시킨 이 작품은 카시스 노트를 주제로 삼은 대표적인 향수이다. 어두운 톤의 그린 노트와 특유의 과일향이 교차하는 Cassis 345가 장미 노트와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스타일의 프루티 플로럴을 탄생시켰다. 독자적인 장르를 구축한 롬브르 단 로의 자취는 카시스-로즈 골격에 파출리를 연결시킨 베스트셀러 프레데릭 말(Frédéric Malle)의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Portrait of a Lady)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Guerlain - Aqua Allegoria Pamplelune 광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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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뇽 블랑의 매력을 보다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향수로는 1999년 출시된 겔랑의 아쿠아 알레고리아 팜플륀(Guerlain Aqua Allegoria Pamplelune)을 꼽을 수 있다. 손으로 짓눌러 짠 듯 과즙이 터져 나오는 자몽으로 시작해 유황내를 더하는 카시스, 쌉싸름한 풀내음의 페티그레인(Petitgrain)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이 작품을 조향한 장 폴 겔랑(Jean-Paul Guerlain)이 평소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즐겨마신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게 만든다. 무더운 여름날 이 향수를 뿌리고 외출을 한다면 지금 와인을 마시러 가는 중이라고 뽐내는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오늘날 소비뇽 블랑이라는 라벨에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지역은 뉴질랜드 말보로지만, 이 품종의 본령은 프랑스 루아르(Loire) 지역에 있다. 대중의 혀가 말보로가 퍼뜨린 열대 과일의 환영에 매료되기 훨씬 전부터 소비뇽 블랑의 원형은 상세르(Sancerre)와 푸이 퓌메(Pouilly-Fumé)에 존재했다. 루아르의 소비뇽 블랑에서는 풍성한 열대 과일 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핵심 성분이자 식물 즙, 청사과 껍질, 옅은 흰꽃 향기 등을 내는 4MMP(4-mercapto-4-methylpentan-2-one)와 IBMP(3-isobutyl-2-methoxypyrazine)는 아미노산 전구체에서 기원하였지만 다른 방향으로 분화한 아로마 분자들이다. 또한 과실미라는 표피를 한 풀 벗겨낸 자리에는 부싯돌 토양과 서늘한 기후가 빚어낸 미네랄리티가 대신 들어앉는다.
루아르 포도밭 / 사진. ©김태형
루아르 포도밭 / 사진. ©김태형
루아르 소비뇽 블랑의 산뜻한 풋내와 가장 흡사한 원료는 갈바넘(Galbanum)이다. 페르시아 고대 문헌과 성경 출애굽기 속에 등장할 만큼 깊은 역사를 지닌 갈바넘은 미나리과 식물인 페룰라(Ferula)의 줄기와 뿌리에 상처를 냈을 때 분비되는 수지에서 추출된다. 갈바넘 오일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성분은 솔잎과 껍질의 향을 내는 테르펜 류지만, 극미량 존재하며 후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IBMP이다. 갈바넘과 루아르 소비뇽 블랑의 풋고추, 갓 깎은 잔디와 같은 후각적 교차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화학적 동일성에 뿌리를 둔 현상인 것이다.

갈바넘과 소비뇽 블랑이 보여주는 녹색 매력은 최초의 그린 플로럴로 일컬어지는 발망(Balmain)의 방 베르(Vent Vert)에서 빛을 발한다. 전쟁 직후 거친 자연의 생명력을 갈망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 향수는 갈바넘의 오버도즈(Overdose)를 단행한 조향사 제르맨 셀리에(Germaine Cellier)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정제되지 않은 갈바넘이 은방울꽃, 히아신스와 같은 상쾌한 플로럴과 어우러지며 바람이 불어오는 루아르 밸리의 포도밭을 연상케 한다. 2021년 프레데릭 말에서 출시한 신세틱 정글은 방 베르의 클래식한 갈바넘 골격을 계승하되, 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향수다. 조향사 안 플리포는 갈바넘에 유황 뉘앙스를 돋구는 카시스를 결합하며 향수의 중심에서 소비뇽 블랑의 상징적인 화학 구조를 온전히 구현해 냈다.
Vent Vert - PIERRE BALMAIN
Vent Vert - PIERRE BALMAIN
무심코 집어 들던 소비뇽 블랑 한 병의 이면에는 이처럼 남반구 태양 아래에서 결실을 맺는 티올의 카시스가, 프랑스 루아르 토양이 숨겨둔 피라진의 갈바넘이 공존하고 있다. 와인을 잔에 따라 삼키는 일과 향수를 피부에 올려 감상하는 행위는 결국 본질적으로 동일한 화학적 분자를 감각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이다. 편하게 소비되던 '소블'이라는 가벼운 이름표를 떼어내고 그 속의 후각적 기호들을 읽어내는 순간, 우리가 우연히 지나치던 일상의 한 모금은 잊지못할 경험으로 탈바꿈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비로소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