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선택지가 좁아질수록 국익을 챙기는 협상은 더 치열해져야 한다. 미국은 중국 주도 AI 협력체에 참여하면 자신들이 이끄는 ‘팍스 실리카’에서 배제하겠다는 경고 서한을 준비 중이다. 미 국무부 초안은 지난 6월 ‘AI 기회 파트너십’ 공동성명에 서명한 35개국을 대상으로 하며, 한국도 포함된다. “모든 곳에 속한다는 것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사실상 양자택일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팍스 실리카 설립 당시 한국을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지목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난달 상하이 세계인공지능대회에 실무진만 보내면서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는 모호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서한은 그동안 양쪽과 협력하며 실익을 챙기던 전략적 모호함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물론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요 생산기지가 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우리에게 똑같은 무게의 선택지일 수는 없다.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반도체 장비, AI 소프트웨어·클라우드뿐 아니라 자본시장과 안보 이슈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미국 생태계 쪽에 훨씬 깊게 연결돼 있다. 중국 AI 진영에 발을 걸친 채 미국의 핵심 기술동맹국으로 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진영 선택 압박에 위축될 게 아니라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협상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미 정부는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의 메모리 도입을 검토하는 애플에 구매 자제를 직접 요구했다. 중국산 반도체를 공급망에서 밀어낼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몸값은 높아진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의 미국 AI·데이터센터와 조달시장 참여를 확대하고 최첨단 GPU와 AI 인프라에 대한 안정적 접근, 핵심 광물 공동 개발 등 실익을 확보해야 한다.

미·중 양쪽에서 이익을 취하던 시대가 끝나간다고 해서 동맹의 의무와 비용만 떠안아야 할 이유는 없다. 철저한 실리 계산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AI 반도체 생태계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