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로봇 산업 발달의 잠재적 피해자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을 지목했다. 로봇이 인간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노동 집약 산업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 성장 모델은 작동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9년이 흐른 지금 예측의 절반은 현실이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진국이 제조업 육성 기회를 잃고 있는 반면 중국은 세계 최대 산업용 로봇 설치국이자 인공지능(AI) 제조 강국으로 떠오르며 ‘세계의 공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문 닫는 동남아 공장들

중진국에서 제조업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한때 수백만 개 일자리를 창출한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이다. 제조업이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32%에서 2025년 19.1%로 크게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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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내수 소비를 떠받치는 중산층 인구가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중산층 인구는 2024년 4790만 명에서 2025년 4670만 명으로 줄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올해 상반기 해고자는 3만2389명”이라며 “국제 경쟁력 하락, 생산 비용 상승 등 제조업 부문 전반의 경기가 둔화한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전체 제조업 고용의 19.1%를 차지하는 섬유 산업 침체가 두드러졌다. 동남아 최대 섬유업체인 스리텍스는 파산 절차 끝에 지난해 3월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아시아퍼시픽섬유도 지난해 11월 공장 가동을 멈추고 1000명을 해고했다. 인도네시아 섬유산업협회는 “섬유 산업의 생산 가동률이 45%에 불과하다”며 “중국산 수입품 급증으로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태국 등 다른 중진국도 제조업 고도화에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태국에서는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매달 100개 이상의 공장이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가구, 전자제품, 의류, 자동차 및 철강을 생산하던 공장이다. 방콕에 본사를 둔 자동차 부품 업체 아피코하이테크는 닛케이아시아에 “태국에 공장을 둔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많은 부품을 현지가 아니라 중국에서 조달해 타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동남아 국가는 단순 하청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제조업이 구성되다 보니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전문 인력 양성에도 실패하며 산업화가 정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중국에 가로막힌 도약

인도네시아와 태국 사례에서 보듯 중진국의 도약 실패에는 중국이 공통 변수로 등장한다. AI와 로보틱스 등 첨단 제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국이 단순 조립·가공 산업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지난해 중국 제조업의 부가가치는 국내총생산(GDP)의 24.7%를 기록했다. 중국 정부도 ‘제15차 5개년 계획’에서 경공업과 섬유 산업 등 전통 제조업에 AI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대표적 노동 집약 제조업인 의류 생산에서 중국 기업의 경쟁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의류 브랜드 보시덩은 주요 공정에서 90%의 자동화율을 달성했다. 이를 통해 기존 28일이던 생산 주기를 3일로 단축했다. 지난 5년간 디지털화와 스마트 제조에 10억위안(약 2126억원) 이상을 투자한 결과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저장성의 한 섬유 기업도 대형 프린팅·자수 기계를 도입하면서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낮은 인건비가 핵심 경쟁력이던 의류·섬유 산업을 중국 기업이 자본·기술 집약 산업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격화하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중진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 차단을 명목으로 미국이 베트남과 멕시코 등에도 높은 무역 장벽을 쌓고 있어서다. 이에 글로벌 기업이 구사하던 ‘차이나 플러스 원’(중국과 함께 다른 나라에 생산기지를 두는 공급망 분산) 전략이 퇴조해 중진국의 제조업 유치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명현 기자 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