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의 2015년작 ‘창파(滄波)’.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작품 제목을 짧게 지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강요배의 2015년작 ‘창파(滄波)’.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작품 제목을 짧게 지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갤러리 문을 열면 폭포가 쏟아진다. 강요배 작가(74)가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힘찬 물줄기를 그린 ‘대서’와 ‘소서’다. 그 옆으로는 성난 파도를 그린 대작 ‘창파’가 관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식힌다. 반면 안쪽 방에 걸린 작품들의 분위기는 평화롭다. 눈 맞은 무청, 늙은 청매화나무, 빨간 열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투는 새 두 마리. 화가가 제주 집 마당에서 늘 보던 소박한 소재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강요배 작가의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12일 개막한다. 회화 28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소소, 반색’.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작고 미미한 존재들을 반갑게 맞이한다는 뜻을 담았다.

한때 4·3사건 등 역사적 소재를 다루며 민중미술에 주력하던 그는 1990년대 제주에 정착한 뒤 30여 년간 섬의 자연과 역사를 함께 그려 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제주의 자연을 소재 삼아 그린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강 작가는 “관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일단 아무런 설명 없이 그림을 맛보고, 그 다음 제목을 봐달라는 것”이라며 “그러면 그림을 통해 더 깊이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그는 이번 전시 작품들의 제목을 한두 글자로 짧게 붙였다. 예컨대 입구의 폭포 그림 ‘대서’와 ‘소서’는 폭포 그림이지만, 제목은 큰 더위와 작은 더위를 가리키는 절기 이름이다. 제주도 전통 신화 속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이 음력 2월 불게 한다는 폭풍 ‘영등바람’을 담은 그림도 주목할 만하다.

주제는 각기 달라도 작품들에서는 일관적인 화풍과 필력,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강 작가는 “기억과 상상으로 머릿속에서 그림을 완성한 다음 화폭에 옮긴다”며 “머릿속으로 어떻게 그릴지 여러 번 생각하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대신 일단 구상이 끝나면 그림은 빨리 그린다. 물감에 물을 잔뜩 섞고 캔버스를 눕혀 놓은 뒤 단숨에 작품을 완성한다. 20분 만에 완성한 그림도 있다. 우연히 생긴 얼룩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강 작가는 “옛날에는 진득하게 그렸는데 지금은 묽게, 살랑살랑 그린다”며 “물감을 겹겹이 쌓는 대신 빠르고 담백하게 그려야 사물에서 받은 첫 느낌이 살아 있는 그림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작가는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작품을 그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속에 갖고 있던 심상들이 캔버스로 올라온다는 설명이다. “그림 설명을 전시장에서 걷어낸 건 국물 맛으로 승부하는 거예요. 한 숟갈만 들어봐라, 이 맛이다, 하는 거지. 꼭 식당 할배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전시는 다음달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