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설계한 박테리오파지(세균 감염 바이러스)인 ‘Evo-Φ36’의 입체 구조.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이 박테리오파지가 실제로 대장균을 감염시키고 증식하는 것을 확인했다. /사이언스 제공
인공지능(AI)이 설계한 박테리오파지(세균 감염 바이러스)인 ‘Evo-Φ36’의 입체 구조.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이 박테리오파지가 실제로 대장균을 감염시키고 증식하는 것을 확인했다. /사이언스 제공
인공지능(AI)이 신약 후보물질 발굴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유전체 자체를 창조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유전체를 설계하고 실제 작동하는 바이러스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 글로벌 바이오 AI 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연계 없는 생명체 생성 성공

브라이언 히에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교수팀은 최근 아크연구소와 AI로 새로운 박테리오파지를 설계·제조한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게재했다. 연구팀은 “AI가 제안한 후보 박테리오파지 285개를 실제 합성해 시험한 결과 16개가 대장균을 감염·증식하는 데 성공했다”며 “기존 박테리오파지보다 표적 세균을 더 효과적으로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항생제로 고치기 힘든 다제내성균(슈퍼박테리아) 감염병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성과를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은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방대한 유전체·단백질 등 생명과학 데이터를 학습해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을 예측하고 새로운 단백질이나 유전체를 설계하는 범용 AI다. 2020년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아미노산 서열을 토대로 단백질의 입체구조를 예측하는 시대를 열었다. 이후 생성형 AI를 이용해 자연계에 없는 단백질을 만드는 기술이 등장했고 이제 설계 범위가 DNA와 유전체 전체로 확대됐다.

스탠퍼드대팀은 이번 연구에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 ‘에보2’를 활용했다. 세균부터 인간까지 생명 전 영역의 약 9조개 DNA 염기쌍을 학습한 모델이다. 챗GPT가 방대한 문장을 학습해 다음 단어를 예측하고 새로운 글을 만들 듯 에보2는 DNA의 배열 규칙을 익혀 새로운 유전체 서열을 생성할 수 있다. 이대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합성생물학연구센터장은 “이번 연구 성과는 숙주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단순한 바이러스였지만, 5년 안에 AI가 세균과 같은 원핵생물 자체를 설계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형 모델 개발 서둘러야”

한국도 바이오 AI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지난해부터 신약 개발용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 ‘K폴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단백질 구조와 다양한 형태 변화, 생체분자 간 결합구조와 결합 세기 등을 예측하는 모델이다. 마크로젠 등 국내 유전체 기업이 축적하고 있는 대규모 유전체 데이터도 향후 바이오 AI 경쟁의 기반으로 활용될 수 있다. 마크로젠은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사업에서 14만여 건의 한국인 전장유전체 데이터 생산·분석을 맡고 있다.

다만 국내 연구 현장에서는 대규모 AI 모델을 운영할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센터장은 “생명연도 필요한 GPU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에보2처럼 막대한 컴퓨팅 자원을 요구하는 범용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한국의 데이터와 연구 환경에 맞는 소버린 바이오 AI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소버린 AI는 데이터와 모델, 컴퓨팅 인프라를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이 독립적으로 운용·통제하는 AI다.

이 센터장은 “알파폴드와 에보처럼 전 세계가 사용하는 범용 모델은 이미 해외 민간기업과 연구기관이 빠르게 앞서가고 있다”며 “한국은 자체 데이터와 연구 수요를 반영한 소형·고효율 모델을 고도화하는 방향이 현실적인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

Bio Foundation Model. 유전체·단백질 등 방대한 생명과학 데이터를 미리 학습한 범용 인공지능(AI) 모델.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유전체를 설계하기위해 AI 모델 ‘에보2’를 활용했다.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