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이 연기한 샤일록은 가해자였고 또한 피해자였다 [연극 리뷰]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그려진다. 돈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에게 계약서에 적힌 대로 살 1파운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섬뜩하다. 하지만 그 역시 베니스에서 온갖 멸시와 모욕을 견뎌 온 소수자라는 점에서 현대 관객들에게 선악 경계는 흐릿하게 다가온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한 달간 공연된 연극 ‘베니스의 상인’이 9일 막을 내렸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두 원로 배우의 만남이다. 박근형이 샤일록을, 신구가 베니스의 공작을 맡았다. 두 배우가 한 무대에 선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연 전부터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렸다.

1959년에도 샤일록을 연기했던 박근형은 오랜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차별과 모욕을 견뎌 온 한 인간의 모습을 깊이 있게 드러냈다. 복수에 매달리는 잔혹함만을 앞세우기보다 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익살스럽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는 평가다. 신구는 등장 분량이 많지 않지만, 특유의 목소리와 화법으로 극의 절정인 재판 장면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공연은 첫 장면부터 강한 인상을 남긴다.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 위로 한 여인이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움직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듯한 이미지가 관객 시선을 단숨에 붙는다. 이후 무대는 간결한 구성과 매끄러운 전환으로 깔끔하면서도 압도적인 인상을 준다.

공연은 원작의 희극적인 특성을 살리면서도 샤일록을 둘러싼 갈등을 무겁게 끌고 간다. 안토니오를 비롯한 베니스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인 샤일록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샤일록 역시 그들에게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샤일록의 딸 제시카가 기독교인 연인과 집을 떠나면서 세대 갈등까지 겹쳐진다.
박근형이 연기한 샤일록은 가해자였고 또한 피해자였다 [연극 리뷰]
이 같은 갈등은 재판 장면에서 절정에 치닫는다. 샤일록은 계약을 근거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지만, 법적 논리로 그는 궁지에 몰린다. 특히 샤일록의 비참한 개종식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샤일록에게 내려진 처벌을 완화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주어진 것이다.

목숨과 재산 일부를 보전해주는 자비의 형식이었지만, 오늘날의 시선에서는 소수자가 지켜온 종교와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폭력으로도 읽힌다. 샤일록의 복수는 정당화하기 어렵지만, 그를 심판한 방식 역시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공연은 끝까지 단순하게만 읽히지 않는다.

서울 공연은 끝났지만 무대는 계속된다. 오는 28~29일 대구 계명아트센터 공연을 시작으로 울산, 경기 이천에서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