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챗GPT 생성 이미지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사모펀드(PEF)는 시체를 쪼아 먹는 대머리독수리를 뜻하는 ‘하게타카(ハゲタカ)’로 불렸다. 1997년 홋카이도 다쿠쇼쿠은행을 시작으로 일본 주요 금융회사가 헐값에 해외 PEF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9일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PEF 거래 규모는 4조8000억엔(약 42조7000억원)으로 전년보다 54.8% 급증했다. 일본 정부가 인수합병(M&A)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날 일본 M&A 전문 조사업체 레코프데이터에 따르면 일본 내 M&A는 올해 상반기 2647건으로 반기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M&A 증가는 기업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 활성화로 이어지며 일본 산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반면 한국 PEF 생태계는 주요 출자자(LP)의 투자가 위축되고 각종 PEF 규제 법안이 잇달아 발의되고 있다.
◇ 장인의 나라, 회사를 사고파는 나라로
삼정KPMG에 따르면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PEF 투자 규모(1449억달러) 중 일본이 사상 최대인 518억달러를 기록하며 약 36%를 차지했다. 이런 변화는 기업승계 해결과 지배구조 개혁에서 나왔다.
일본은 대를 이어 가업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나라다. 100년 넘게 이어온 노포 기업만 4만5000곳이다. 전 세계 100년 기업 10곳 중 6곳이 일본에 있는 이유다. 그러나 저출생·고령화로 후계자 없는 기업이 쌓이자 ‘가업은 피로 잇는다’는 통념 대신 ‘경영을 잘할 사람에게 넘긴다’는 실용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2008년 경영승계원활화법을 제정해 제3자 M&A 승계를 지원했고, 47개 광역자치단체에 사업승계센터를 설치했다. 회사 매각이 자연스러워지자 인수 주체인 PEF를 향한 거부감도 옅어졌다.
지배구조 개혁도 한몫했다. 2012년 아베노믹스 이후 상호출자 관행이 정부 압박으로 줄자 그 빈틈을 행동주의 펀드가 파고들었다. 도쿄증권거래소가 2023년부터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 상장사에 개선을 요구하면서 주주행동주의는 더 거세졌고, 비핵심 사업 매각과 비상장화가 늘며 PEF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세븐일레븐(세븐앤드아이홀딩스)은 부진하던 슈퍼마켓·외식 사업을 작년 9월 미국계 PEF 베인캐피탈에 53억7000만달러(약 7조5000억원)에 넘겼다. 캐나다 경쟁사 쿠슈타르의 적대적 인수 시도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세븐앤드아이가 몸집을 가볍게 만들어줄 구원투수로 PEF를 택한 것이다.
일본이 PEF를 M&A 주요 주체로 받아들인 것은 산업 활성화와 국가 경제에 보탬이 돼서다. 이는 한국도 다르지 않다.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2015년부터 10년간 PEF가 투자한 국내 기업의 임직원은 연평균 9% 증가해 전체 고용 증가율(4%)을 두 배 이상 웃돌았고, 매출 연평균 증가율은 12%로 국내 산업 평균보다 2.7배 높았다.
◇ 글로벌 PEF, 일본으로 집결
글로벌 금융회사가 앞다퉈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도 시장이 커져서다. TPG는 지난 4월 도쿄 도라노몬힐스에 신규 사무소를 열었다. 블랙스톤은 131억달러 규모 아시아 펀드를 조성했다. 칼라일은 일본 인력을 40% 늘려 35명 규모로 키웠다.
대형 딜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는 후지소프트 지분 33.57%를 39억달러(약 5조7700억원)에 인수하며 일본 사모펀드(PE)시장 최대 거래를 기록했다. 베인캐피탈은 도시바메모리(현 키옥시아)를 2024년 12월 상장시킨 뒤 지분 일부를 3550억엔에 블록딜 매도했다.
토종 하우스도 체급을 키우며 상장폐지 거래에서 활약하고 있다. 폴라리스캐피털그룹은 조제약국 체인 소고메디컬을, 인티그럴은 무토홀딩스와 골프다이제스트온라인을 잇달아 비상장화했다.
정부가 M&A 문턱을 낮춰 PEF가 성장하고, PEF가 산업 재편을 이끄는 선순환이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은 PEF를 규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산업이라는 큰 톱니바퀴를 돌리는 하나의 부품으로 M&A를 활용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