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과제 지정땐 보안의무 급증
대학들 전담 인력·예산 태부족
제재권 없어 자체 조사도 한계
"제약 과해, 연구의욕 꺾일 우려"
국가 연구개발(R&D) 과제를 일반·보안과제에 이어 ‘민감과제’로 세분화하는 제도 시행이 보름 앞으로 다가오면서 연구 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가 안보와 첨단기술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취지지만 민감과제 지정 기준이 불명확해 대학과 연구 현장의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자들은 연구보안 강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국제 공동연구와 연구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세밀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아리송한 민감과제에 대학가 ‘난색’
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개정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시행된다. 개정안의 핵심은 R&D 과제에 민감과제를 신설하는 것이다. 민감과제는 보안과제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지만 국가안보와 기술적 가치 등을 고려해 추가 관리가 필요한 과제를 말한다. 현재 국가 R&D 과제는 보안과제와 일반과제 등 두 단계로 관리되고 있는데, 앞으로는 두 단계 사이에 민감과제가 추가된다.
문제는 민감과제 분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민감과제는 국가안보·외교 등을 위한 전략적 필요성, 기술적·경제적 가치 및 관련 산업의 성장 잠재력 등을 고려해 분류한다. 하지만 어떤 기술과 연구가 민감과제에 해당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보안과제 분류 기준이 방위력 개선사업 관련 연구, 국가핵심기술 등으로 구체적으로 규정된 것과 대조적이다.
대학들은 민감과제가 어떤 기준으로 지정되고 운영되는지 명확하지 않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분류 기준이 중요한 이유는 민감과제로 지정되는 순간 연구자와 연구기관이 부담해야 하는 보안 의무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과도한 제재 때문에 연구 의욕이 꺾인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보안 의무를 어기면 연구개발비가 전액 환수되고 국가연구개발사업에 2년간 참여할 수 없게 되는 등 행정제재를 받을 수 있다. 서울대는 지난 5월 교육부의 국가연구개발혁신법 개정안 의견조회 공문에 “연구의 자율성과 정보보호가 함께 보장될 수 있도록 민감과제와 보안과제를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회신했다.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오는 10월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불확실성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조사 권한 없어 뒤늦게 수사 의뢰
대학들은 보안 전담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강화되는 연구보안 의무를 이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연구보안 조직이 있는 대학이더라도 강제 조사권과 제재 권한이 없어 개인정보보호법상 연구자의 개인 이메일이나 저장장치에 임의로 접근해 증거를 확보하거나 포렌식 조사를 하기가 쉽지 않다. 연구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는 이상 위험을 사전에 포착하기도 어려워 기술 유출 정황이 드러난 뒤에야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에 의뢰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대학 내부 조사와 정보기관 합동점검, 수사까지는 통상 수개월이 걸려 이 과정에서 이메일이 삭제되거나 자료가 추가로 반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4년 퇴직 예정 연구원이 초소형 위성 과제 등 연구자료 수십 기가바이트(GB)를 무단 반출하려다 적발된 KAIST 인공위성연구소 사건도 합동조사에서 해외 유출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초기 증거 확보와 분석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수사받던 연구원이 지난해 말 사망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대학의 대응은 예방적 안내 수준에 그치고 있다. 특정 국가에 있는 대학에서 활동할 경우 향후 다른 국가 연구기관과의 공동 연구 등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고지하는 정도다.
국제 공동연구를 과도하게 제한하면 연구의 개방성과 우수 인력 확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정익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연구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위험 요인을 걸러낼 수 있도록 세밀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