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와 ‘파묘’ ‘극한직업’까지 1000만 영화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곳이 있다. ‘군체’ ‘살목지’ ‘호프’처럼 돈 버는 영화의 뒷배 명단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은행권 중 유일하게 문화콘텐츠 전담 조직을 운영 중인 기업은행 얘기다. 손대는 영화마다 대박이 나자 영화계에선 ‘기업은행이 투자하면 흥행 보증수표’라는 얘기가 돌 정도다. 뮤지컬과 미술 전시회로 투자 범위를 넓힌 기업은행이 K콘텐츠 생태계에서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투자하면 1000만 영화

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기업은행은 올해 상반기 문화콘텐츠 분야에 총 456억원을 투자했다. 전년 동기 대비 156% 증가한 수치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기업은행의 문화콘텐츠 투자 규모는 2021년 216억원에서 지난해 549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총누적 투자 규모만 4245억원에 달한다.
직전작 실패한 명장·젊은 감독 데뷔작에 베팅한 기업銀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조직의 핵심 수익원은 영화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 25편 가운데 12편이 기업은행에서 투자받았다. 기업은행은 ‘극한직업’ ‘범죄도시2’ ‘파묘’ 등에서 100% 이상의 수익률을 맛봤다. ‘명량’ ‘국제시장’ ‘신과함께 1·2’ 등 굵직한 1000만 영화의 투자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올 들어선 역대급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극장가 최고 화제작인 ‘왕과 사는 남자’에 투자해 220%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군체’(595만 명), ‘호프’(426만 명), ‘살목지’(324만 명) 등 올해 기업은행 투자를 받은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다.

◇ 실패를 존중하는 투자 공식

기업은행의 영화 투자는 2012년 신설된 ‘문화콘텐츠투자팀’에서 주도한다. 시중은행 중 문화콘텐츠에 직접 투자하는 조직을 운영하는 건 기업은행이 유일하다.

6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매년 수십 편의 작품을 꼼꼼히 검토한 뒤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1차적으로 감독과 배우의 과거 작품뿐 아니라 행적, 세평을 살핀다. 정치적·종교적 편향성을 걸러내는 것은 기본이다. 시나리오 완성도와 장르의 대중성을 놓고 팀원 간 격론을 벌인다.

투자 성공과 실패가 엇갈릴 때마다 그 비결과 시행착오를 빠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10년 이상 기록이 쌓여 절대 투자하지 말아야 할 작품과 돈을 써야 하는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이 됐다. 이것이 기업은행의 노하우인 ‘투자 체크리스트’다.

예컨대 직전 작품에서 실패한 유명 감독이 제작한 영화에는 10%의 가점을 부여한다. 시행착오를 만회하기 위해 차기작에 전력을 다하는 사례가 많아서다. 반대로 감독이나 주연 배우가 3연속 흥행 가도를 달렸다면 10%를 감점한다. 30대와 40대 감독의 데뷔작에 10%의 가점을 주는 항목도 있다. 강승현 기업은행 문화콘텐츠팀 부장은 “실패를 경험한 뒤 나오는 절박함과 독창성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고 말했다.

물론 체크리스트는 영화산업 트렌드에 따라 수시로 수정한다. 최근에는 촬영 개시 후 1년 이상 경과한 작품은 10% 감점하는 방안을 추가했다. ‘창고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 실패한 점을 참고했다.

◇ 비영상 분야로 투자 확대

기업은행은 영화의 성공 방정식을 전시, 뮤지컬 등에 접목하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이 위축된 데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강세로 투자할 수 있는 드라마가 급감한 영향이다.

기업은행은 올해 ‘인상파의 밤, 파리 1874’와 ‘성률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 등 굵직한 전시회에 자금을 투입했다. ‘알라딘’ ‘위키드’ 등 대형 뮤지컬에 투자한 데 이어 올해는 ‘렘피카’ ‘드라큘라’ ‘겨울왕국’ 등 대작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강 부장은 “문화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K콘텐츠 생태계 육성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