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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판사 vs '판단'하는 판사
한경 CHO Insight
얼마 전 지방에 있는 모 법원에서 있었던 재판은 참 인상 깊었다. 30분 전 미리 법정에 들어가서 선행 사건의 변론을 방청하였다. 꽤 복잡한 사건처럼 보였는데, 재판장이 한참 동안 원고 대리인과 공방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아, 그럼 제가 틀린 거네요”라고 하면서, 본인의 생각 또는 인식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였다. 대리인으로서는 ‘재판부가 사실관계나 법리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큼 불안한 것이 없는데, 재판장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은 채 인식 오류를 솔직하게 시인한 다음 이에 관해 새롭게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참 신선했다.
이후 필자가 대리하는 사건에서는 재판 내내 재판장은 “제가 잘 몰라서요”라고 운을 뗀 후 양쪽 대리인과 질문을 주고 받았다. 질문의 내용과 깊이에 비추어 볼 때, 기록을 검토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인데도, 재판장은 연신 “제가 진짜 잘 몰라서요”라고 하면서 양쪽 대리인의 생각과 의견을 구했다. 겸손한 자세로 양쪽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에 경의가 느껴졌다.
아쉬운 재판도 있었다. 법원 정기 인사에 따라 이루어진 담당 재판장 변경을 전후하여 상대방이 대리인을 새로 선임하였고, 직접 소송에 대응하던 의뢰인도 우리를 새로 대리인으로 선임하였다. 변론시간 직전에 상대방 대리인의 준비서면이 송달되는 바람에, 필자는 이를 확인할 새도 없이 변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재판장 역시 상대방 준비서면이 제출된 사실을 법정에서 비로소 확인한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짧게라도 변론기일을 속행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판장은 바로 변론종결을 선언한 후 선고기일을 지정하였다. 필자보다 오히려 상대방 대리인이 더 깜짝 놀라 속행을 구하였지만, 재판장은 “판단 가능합니다”라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상대방 대리인과 필자가 5분 동안 한 마음 한 뜻으로 재판장을 설득해 보았지만, 연신 “판단 가능합니다.”, “판단 가능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한 다음 변론종결을 선언하였고, 이후 3주 뒤 판결을 선고하였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상대방이 제출했던 준비서면에는 새로운 주장, 새로운 사실관계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았는데, 우리로서는 이에 관해 제대로 변론할 기회 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그리 급하게 처리할 사건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급하게 재판을 진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짧은 경험에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지만, 재판의 본질은 법원과 당사자가 함께 서로 인식의 오류와 그 간극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이를 좁혀 나가는 절차라고 생각한다. 인식에 오류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는 법원, 인식에 간극이 있는데도 충분한 변론을 통해 이를 줄여나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법원의 재판에 신뢰를 보내기는 어렵다. 전에 ‘재판은 연극과 같아서, 법원이 열심히 들어주는 외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법대 아래에서 법대를 바라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다양한 유형의 재판을 경험하면서, 정말 열심히 경청하는 재판부와 열심히 경청하는 척하는 재판부를 이제는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부가 올 하반기 입법을 추진해 달라고 하면서 국회에 포괄임금 오남용 방지를 비롯해 11개 노동법안 목록을 제시하였다. 포괄임금계약을 규제할 근로기준법 개정안, 일하는 사람 권리기본법 제정, 근로자 추정제 도입,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법제화 등 여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정리되지 않은 법률안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하는 사람 권리기본법은 일종의 ‘권리장전’ 형태로 일하는 사람의 권리 보호를 위해 국가의 책임을 부여하자는 취지로 기획하였는지 모르지만, 제출된 입법안 내용만으로도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사업자에게 실질적·구체적인 구속력 있는 법률 규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상당한데, 여기에 더해 노동계는 더욱 실효성 있는 세부내용 추가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근로자 추정제 역시 마찬가지다. 도입 시 존폐를 가름할 정도로 보험업계나 방송업계, 엔터테인먼트업계 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아직까지 입법 내용의 방향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좋은 재판도 그렇지만, 정책도 정부와 정치권이 이해관계자 사이의 인식의 오류와 그 간극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진지하게 이를 좁혀 나가는 절차를 거칠 때, 비로소 좋은 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아, 그럼 제가 틀린 거네요”라며 잘못을 시인할 때, 오히려 그렇게 추진된 정책이 더 신뢰받을 수 있다. “제가 잘 몰라서요”라고 하면서 진지하게 이해당사자의 의견과 조언을 구할 때, 더 신뢰받고 좋은 정책이 발굴될 수도 있다. 반면 이와 같은 절차를 무시하고 “판단 가능합니다”라고 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은 절대 신뢰받을 수 없다. 의견을 수렴한다는 명목으로 공청회 몇 번 더 한다고 해서 좋은 정책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민들도 이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경청하는 척하는 것과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추진한다는 노동 관련 입법 내용은 모두 이해관계자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이다. 부디 시한을 정해 놓고 성급하게 추진하려고 하지 말고 진지하게 이해당사자와 국민의 의견부터 경청해 보기를 당부하고 싶다.
조찬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