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8월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리용호 당시 북한 외무상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 오른쪽 위는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8월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리용호 당시 북한 외무상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 오른쪽 위는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북한이 역내 유일하게 가입해 있는 다자 안보협의체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에 2년 연속 불참했다. 러시아는 이번 회의 기간 한반도 비핵화 요구에 더 이상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북한은 23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RF 외교장관회의에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가입 후 처음 회의에 나오지 않았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불참을 택했다.

ARF는 북한이 참여해온 사실상 유일한 역내 다자 안보협의체다. 북한은 2000년 ARF에 가입한 뒤 외무상 등 고위급 대표를 보내 역내 국가들과 접촉하고 한반도 현안에 관한 자국 입장을 알려왔다. 회의 결과를 담은 의장성명에 유리한 표현을 넣기 위해 한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ARF 참여는 2019년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눈에 띄게 위축됐다. 북한은 외무상 대신 개최국 주재 대사나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수석대표로 내보내는 등 참석자의 급을 낮췄고, 지난해부터는 대표단 자체를 보내지 않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북한이 당분간 ARF 복귀보다 북·러와 북·중 관계 강화에 힘을 실을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와의 군사·경제 협력을 통해 실익을 확보하고 중국과도 고위급 교류를 재개한 만큼,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자회의에 참석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23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23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가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에서 이탈한 점도 북한의 외교적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전날 마닐라에서 열린 러시아·아세안 외교장관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 주변에서 북한을 억제하거나 군사행동을 유발하려는 공격적 움직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한반도 비핵화 요구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한국과 일본, 일부 미국 정치인들이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일의 대북 억제와 군사협력을 문제 삼으며 북한 핵 개발의 책임을 미국과 동맹국에 돌린 것이다.

러시아는 과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과 군사협력을 확대하면서 대북 제재 이행과 비핵화 공조에서 사실상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러시아가 북핵 문제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일 외교부 대변인은 23일 브리핑에서 "북한의 지속적인 핵 개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등 국제법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행위"라며 "한반도와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밝혔다. 이어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창설 주도국으로서 북핵 문제에 보다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러 군사협력으로 한·러 관계가 제약받고 있지만, 러시아와 필요한 소통은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박 대변인은 "러시아의 건설적인 역할을 견인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고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의 실질적 진전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중동 정세 등 다른 외교 현안에 집중하며 북한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점도 북한의 관망 기조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북한이 당장 북·미 대화나 다자외교에 복귀하기보다는 핵·미사일 능력과 중·러와의 관계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 조건이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릴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