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는 내용의 핵협정을 승인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AP통신은 21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합의안을 지난 주말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22일 합의안에 서명할 예정이다.
'사우디 우라늄 농축' 빗장 푼 美…韓핵잠도 영향 미치나
이번 협정에 핵무기 원료를 추출할 수 있는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금지 조항은 담기지 않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워싱턴 정가에서 나오는 이유다.

사우디가 우라늄 농축 역량을 갖추면 중동 지역 다른 국가도 비슷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핵추진 잠수함 도입을 추진하는 한국 정부도 역시 이 같은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 원자력 협정 승인…美 원전산업 부활 포석
2년간 우라늄 농축 공동연구…타당성 입증하면 시설 건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22일 서명할 예정인 원자력협정 내용에 사우디 내 우라늄 농축 시설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의 핵 능력에 이전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실상 보유한 가운데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추진하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IAEA 감시 약해질 수도

2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과 사우디가 2년간 연구기간을 거쳐 사우디의 자체 핵 농축이 타당한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핵 농축이 허용되더라도 민감한 농축 기술이 사우디에 이전되지 않도록 하는 ‘블랙박스’ 계약을 통해 관련 시설을 지을 예정이다. 웨스팅하우스 대형 원전인 AP1000 원자로 모델이 직접적인 수혜를 볼 것으로 WSJ는 평가했다.

평화적 목적의 민간 원자력발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최고 수준의 원자력 안전 및 핵 비확산 기준을 준수하는 협정”이라며 “안심해도 좋다”고 했다. 그는 미국 원전산업 부활을 위한 포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문제는 협정 내용에 사우디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감시 체제를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우디는 자국 내 우라늄 농축이나 원자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인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를 거부했다고 WSJ는 보도했다. 사우디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강화된 감시·사찰을 보장하는 추가 의정서에 서명하는 것 역시 거절했다. CNN은 이번 사우디 합의가 IAEA의 감독 강화에 동의하고 농축 및 재처리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던 아랍에미리트(UAE)와의 협정(2009년)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WSJ는 “트럼프 정부 관료들은 사우디와 별도로 협상한 합의안을 통해서도 미국이 제공한 시설에 적절한 감시가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비판론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헨리 소콜스키 비확산정책교육센터(NPEC) 소장도 WSJ에 “사우디의 행보는 UAE, 튀르키예, 이집트의 (유사) 행보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것이 행복한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워싱턴DC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이란 전쟁까지 벌어진 만큼 중동 국가들 내부에서 핵무장 여론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美, ‘핵 유연성’ 커졌다

트럼프 정부와 공화당 내에서는 동맹의 핵 보유를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엘브리지 콜비 미국 전쟁부(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은 중국의 패권 견제를 위해 동맹국의 자체 핵무장이나 핵 공유를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공화당 주요 인사 중에서도 미국의 ‘세계 경찰’ 역할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동맹의 역할 분담 중 하나로 핵 억지 능력 강화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한 공화당 실무자는 “북한과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기류가 존재한다”고 전했다. 북핵 문제 등을 고려할 때 기존 비핵화 전략과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커졌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목소리는 주류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사우디 원자력협정이 미국 의회에 보고되면 동맹의 핵 보유 가능성에 관한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하려면 공동 결의안과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합의 내용을 되돌리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우디 핵 협정과 관련해 “미국 입장에서는 이란 견제가 가장 큰 목적일 것”이라며 “미국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체 농축 역량을 확보하는 것까지 가능할 수 있다면 한국 입장에서 미국 정부에 어떤 반대급부를 제공하고 이를 얻어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동현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