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기록적인 폭염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유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독일 생활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경험한 에어컨 없는 독일의 여름은 2008년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사우라는 소도시에서 독일어 단기 어학 코스를 들을 때였다.

한참 열심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독일 쾰른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던 후배 한 명과 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날아온 후배 한 명이 뮌헨을 거쳐서 베를린에 간다고 했다. 나는 당장 뮌헨으로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뮌헨 중앙역 맥도날드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나는 오랜만에 ‘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에 그 앞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성였다.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한 우리는 바로 근교 열차를 타고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을 수용한 다하우수용소로 향했다. 우리는 독일에서도 제일 잘산다는 뮌헨의 도시 풍경보다 역사의 현장을 더 보고 싶었다.

고작 더위와 추위로 일이고 생활이고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냉난방이 잘되는 실내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철없는 나지만, 다하우수용소를 거닐던 20대 초반의 나는 에어컨 없는 독일의 여름도 잊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가 적힌 철문을 통과해 당시 사진을 보고 물건을 쓰다듬으면서 광기의 과거를 느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당시 유대인 수용소 사람들의 삶이 마치 나의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이 일군 생업과 가족으로부터 끌려 나와서 노예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강제수용소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비단 1940년대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과 상황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결국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 모두가 지옥에 떨어져서 버둥대고 있을 때 그래도 그 삶을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부대끼다가 보여주는 조금의 선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매시간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단해서 매번 좋은 쪽으로 결정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정당한 처벌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많은 전쟁과 사고의 피해자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것이 운명이든 역사든 어쩔 수 없는 소용돌이든, 겪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생하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충분히 보상해준 후에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일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놓으면 안 된다. 나의 자존감과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남을 향한 선의와 작은 행동들을 말이다. 그것이 결국 서로를 지탱해주고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