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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칼럼] 서예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질문으로 대해야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
인생에 대한 질문으로 대해야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
감상도 마찬가지다. 서예 작품 앞에 서면 뭔가 알고 봐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먼저 온다.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서체 이름만 들어도 벌써 머리가 복잡하다. 해서는 단정하고 반듯하며, 행서는 물 흐르듯 유려하고, 초서는 거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한 획 안에서도 굵기가 달라지고, 공간의 빈자리 하나가 작품 전체의 긴장감을 결정하기도 한다.
‘한자도 모르는데… 그냥 봐도 되는 건가.’ 모르고 보면 무식해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제대로 공부하자니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결국 서예는 박물관 유리 너머의 유물처럼, 가까이 있지만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존재로 굳어버렸다. 수천 년의 역사가 오히려 서예를 멀리 밀어낸 셈이다.
그런데 이정의 작업 앞에 서면 그 거리감이 조용히 무너진다. 처음엔 솔직히 당황스럽다. 글자와 먹과 붓이 등장하는 건 맞는데, 공간을 가득 채운 설치가 되기도 하고, 몸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이 되기도 하고, 바닥과 기둥, 벽 전체를 아우르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추상화 한 점을 보는 것 같고, 어떤 작품 앞에서는 조각이나 설치 작업 앞에 선 것 같다.
‘이게 정말 서예인가’ 싶은 순간이 온다. 그런데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처음 보는 방식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 따라온다. 서예가 품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번역돼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다.
이정은 매체에 두려움이 없는 작가다. 서예는 한지에 써야 한다, 여백의 미를 살려야 한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그는 자연스럽게 넘어선다. 캔버스 위 그림처럼 보이든, 공간을 채운 설치 작품처럼 보이든 그 안에는 언제나 문자와 획, 먹의 감각이 살아 있다. 형식은 달라지지만, 태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서예의 본질을 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형식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한지 위 글씨에 머물지 않는다. 붓은 종이를 긋는 도구가 아니라 몸과 자연이 서로 스며드는 접점이 되고, 획은 단순한 필선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몸짓이 된다. 음양이 서로를 품고 밀어내며 만물이 끊임없이 생겨나듯, 붓과 몸과 자연은 서로를 인식하며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앞에서는 이해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서예가 아름다운 글씨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처음 문자를 쓰기 시작했을 때의 근원적인 충동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전해진다.
이정의 작업 앞에 서면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서예를 어렵다고 느낀 건 서예가 정말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이 너무 크고 오래된 것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자는 어디서 왔는가, 집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읽는가.
이정은 그 질문들을 붓 하나로 다시 꺼내 보인다. 글씨를 잘 쓰는 것이 서예의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정의 작업은 그 생각을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바꿔놓는다. 어쩌면 서예는 처음부터 규칙이 아니라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정은 지금, 그 질문을 가장 넓고 깊은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