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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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넷플릭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2'를 통해 장안의 화제가 된 셰프가 있다. 방송을 통해 처음 등장해 준우승까지 차지한 '요리괴물' 이하성이다. 그가 최근 한국이 아니라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독립 레스토랑을 열었다. 지난 5월 문을 연 머리힐의 ‘오야트’ 얘기다. 만약 이곳을 방송 후광에 기댄 ‘셀럽 셰프 식당’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본질의 절반은 놓치는 셈이다.

자신의 성을 딴 레스토랑

이 셰프는 국내에서는 ‘흑백요리사’ 시리즈를 통해 알려졌지만 이미 다이닝업계에선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미국 내파밸리의 ‘더 프렌치 런드리’, 뉴욕 ‘그래머시 태번’, 덴마크 코펜하겐 ‘제라늄’ 등 내로라하는 식당을 거쳤다. 뉴욕 ‘아토믹스’에서 셰프 드 퀴진으로 재직하며 미쉐린 2스타를 함께 만들어낸 이력은 그가 대한민국 최고 셰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손색이 없다. 세계 최상위 파인다이닝 주방을 거친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대가 오야트다.
한식과 프렌치 파인다이닝 스타일이 조화를 이룬 포리지(죽). /ⓒ이영민 칼럼니스트
한식과 프렌치 파인다이닝 스타일이 조화를 이룬 포리지(죽). /ⓒ이영민 칼럼니스트
이름은 셰프의 성 이(李)의 옛 한국어인 ‘오얏’에서 따왔다. 그러나 코스 어디에도 제대로 ‘한식 코스’라고 부를 만한 요리는 없다. 쌀, 장아찌, 쑥, 깻잎, 막걸리 지게미 같은 한국적 재료는 오야트 안에서 오직 ‘기억’의 층위로만 사용된다. 요리의 방향성은 ‘더 프렌치 런드리’식 농장 기반 컨템퍼러리 파인다이닝에 가깝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크라운 데이지 팜’이라는 농장에서 채소와 허브를 공급받고, 발효와 보존 방식은 코스 곳곳에 섬세하게 깔린다.

레스토랑 위치는 머리힐 125 이스트 39번가, 전형적인 뉴욕 브라운스톤 건물이다. 좁고 높은 타운하우스 건물에 격자형 창이 달려 있어 길에서 보면 손님의 실루엣이 창 너머로 비친다. 공간의 동선 또한 흥미롭다. 손님은 1층 라운지 ‘라틀리에’에서 작은 카나페 등으로 식사를 시작하고, 코스 중반에 2층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겨 메인과 디저트를 이어간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선 자체가 일종의 서사로 작동한다. 가격은 테이스팅 메뉴 210달러, 와인 페어링 170달러로 표기상 8코스지만 미냐르디즈(미니 디저트)까지 합치면 더 풍성하게 느껴진다.

예술 작품이 된 식재료

1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박선기 작가의 약 400㎝ 길이 투명 석영 작품이다. 그 아래로는 작은 유리병들이 진열돼 있는데, ‘4·16 체리 블라썸’ ‘툰 비네거 HL’ ‘드라이드 선초크 HL’같이 손글씨로 라벨을 붙인 발효물과 보존물이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실제 요리에 쓰이는 재료다. 발효와 보존이 이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축이라는 사실을 공간이 시각적으로 먼저 보여준다.
발효 당근을 채워 넣은 찹쌀가루 도넛. /ⓒ이영민 칼럼니스트
발효 당근을 채워 넣은 찹쌀가루 도넛. /ⓒ이영민 칼럼니스트
첫 디시부터 코스의 방향성은 분명했다. ‘엠버스 오브 어스: 루트 베지터블 콩소메’는 채소 특유의 쓰고 직설적인 맛을 비껴가며 복합적인 단맛과 감칠맛 그리고 은은한 카레의 뉘앙스를 풍긴다. 채소만으로 이런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 자체가 인상적이다. 뒤따라 나온 ‘발효 당근 도넛’은 한입짜리 요리가 얼마나 많은 맛의 층위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룽지의 꾸덕한 부분만 남긴 듯한 도넛 식감 속에서 새우의 풍미, 발효 당근의 산미 그리고 오렌지 필의 뉘앙스가 차곡차곡 쌓인다. 코스의 정점은 추가로 주문한 ‘오이&카비아리 크리스털 캐비아’였다. 오이를 나물과 압축, 액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고 훈연한 장어 무스와 캐비아를 결합해 완벽한 복합미를 선보인다.
관자 같은 식감을 구현한 광어 디시. /ⓒ이영민 칼럼니스트
관자 같은 식감을 구현한 광어 디시. /ⓒ이영민 칼럼니스트
2층 다이닝룸으로 이동해 진행된 메인 코스에서는 식재료의 익힘이 압권이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산 광어 디시는 감자 껍질과 훈제 생선뼈로 만든 소스가 곁들여져 나오는데, 광어 같지 않은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을 유지한다. 마치 최상급 관자를 아주 살짝만 익혀 먹는 듯한 질감이다. 이 셰프가 방송 전부터 왜 그토록 명성이 자자했는지 이 한 접시로 단번에 실감하게 된다.

스스로를 증명한 한인 셰프

‘흑백요리사 2’에서 안성재 셰프에게 선보인 죽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그니처 코스 ‘스프링 그린 포리지’도 인상 깊다. 현미를 알 덴테(씹는 맛이 있도록 덜 익힌 정도)로 조리해 누룽지 질감을 구현하고, 강된장의 뉘앙스를 가미해 한식의 기억과 글로벌 파인다이닝 형식이 만나는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메인인 메추리 요리는 수십 년의 교배 끝에 살집을 두툼하게 키워낸 메추리를 쓴 게 특징이다. 칼로 써는 순간 탱탱하고 찰지면서도 부드러운 균형이 살아난다.
샐러드 느낌을 낸 쑥 아이스크림. /ⓒ이영민 칼럼니스트
샐러드 느낌을 낸 쑥 아이스크림. /ⓒ이영민 칼럼니스트
쑥 아이스크림 디저트가 나올 때는 이 셰프가 직접 테이블 앞에 섰다. 그는 “쑥 아이스크림에 농장에서 가져온 파바 콩순, 레몬, 키위를 곁들인 샐러드 디저트”라고 한국어로 설명했다. 전통적인 프렌치와 달리 채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실험 정신이 돋보였다. 마지막 디저트인 ‘프리저브드 카라카라 오렌지’는 스푼 옆 날로 단단한 머랭 위쪽을 깨뜨려 먹는다. 안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옐로 벨 페퍼의 산뜻한 매콤함과 미세한 피망 향이 시트러스 톤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자신의 성을 따 레스토랑 이름을 지은 이하성 셰프. /ⓒ이영민 칼럼니스트
자신의 성을 따 레스토랑 이름을 지은 이하성 셰프. /ⓒ이영민 칼럼니스트
오픈 초기여서 일부 서비스의 편차나 2층 나무 바닥의 미세한 소음 같은 빈틈은 조금 느껴졌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다듬어질 영역에 가깝다.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것이 이 셰프의 단편이었다면, 오야트는 그가 십수 년간 가다듬어 온 본업의 진짜 밀도를 증명한다. 한국인 셰프가 뉴욕 파인다이닝 신 중심에서 자신의 언어로 그리는 요리가 세계 최상위 좌표 위에 있다는 것,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이영민 Wave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