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EPA연합뉴스
사진=EPA연합뉴스
“삼전닉스로 많이 벌었으니 팔고 일본으로 떠나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대거 자금을 옮기고 있다. 올해 상반기 한국 주식시장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매도 행진을 이어간 반면, 일본 주식시장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인공지능(AI)와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일본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글로벌 자금이 ‘머니무브’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48조3160억원 규모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지난달 29일에는 외국인이 하루 만에 7조756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일일 순매도 규모로 따지면 1998년 집계가 시작된 이후 역대 최대치다. 외국인 매도는 반도체 대형주에 집중됐다. 외국인들은 삼성전자를 3조8000억원, SK하이닉스를 3조2000억원 각각 매도했다. 이날 전체 외국인 순매도액의 약 90%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외국인 보유 비중도 크게 낮아졌다. 지난달 말 기준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약 47%로 16년7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SK하이닉스 역시 약 50%까지 내려가 최근 수년 내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반면 일본 증시에는 외국인 자금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해외 투자자의 일본 현물주식 순매수 규모는 10조9391억엔(약 104조6000억원)에 달했다. 반기 기준으로 과거 최대였던 아베노믹스 초기인 2013년 상반기의 8조3000억엔을 넘어서는 규모다.

증권가는 이 같은 외국인의 머니무브 배경에 한국 주식 급등에 따른 차익 실현과 리밸런싱(자산 재배분) 압력이 자리한 것으로 분석했다. 코스피지수는 상반기 101% 급등했지만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39% 오르는 데 그쳤다.

"다카이치 밀어주는 일본 주식시장은 보물창고"

블랙록,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운용사들은 한국과 일본을 별개의 시장이 아니라 하나의 아시아 테크 생태계로 묶어 비교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완제품(HBM·D램)의 핵심 공급국, 일본은 장비·소재 중심의 상류 공급국이라는 구조 속에서 투자자들은 ‘완제품 비중을 줄이고 장비·소재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 즉 같은 바운더리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대체 가능하거나 보완 가능한 자산군으로 취급되는 셈이다.

펀드 성격에 따라 또 다른 시소 구조도 작동한다. MSCI 기준 일본은 선진국(DM), 한국은 신흥국(EM)에 속하지만, 아시아 펀드나 글로벌 테크 펀드에서는 두 시장이 사실상 하나의 투자 풀로 묶인다. 안정성과 밸류업을 이유로 일본 비중을 늘리거나, 성장성과 모멘텀을 이유로 한국 비중을 확대하는 식의 자금 이동이 반복되는 구조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집중한 핵심 분야는 AI 관련 주식이다. 도쿄일렉트론 같은 반도체 제조장비 핵심 기업뿐 아니라, 데이터센터용 광섬유 제품으로 급성장하는 후지쿠라, 조미료 기술에서 발전한 반도체 절연재료 분야에서 세계 높은 점유율을 가진 아지노모토 등 AI 산업의 ‘숨은 주역’ 기업들을 주로 사들였다.
"삼전닉스로 많이 벌었으니 일본 가자"…'한국 탈출' 러시 [도쿄나우]
미국 퍼스트 이글 인베스트먼트의 글로벌 밸류 팀 부책임자인 크리스티안 헥은 “일본에는 글로벌 틈새 시장에서 강한 기업이 많아 보물창고와 같다”고 평가했다.해외 투자자의 일본 주식 매수는 2025년 10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 출범 전후부터 더욱 빨라졌다. 최근 유럽 투자자들을 방문한 미쓰이스미토모DS자산운용의 하트 알렉산더는 “다카이치 정권의 지지율과 경제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질문을 받았다. 정부가 내세우는 성장 전략에 대한 기대가 강하다”고 말했다.

외국인은 일본 기업의 체질 개선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기업 지배구조 개혁과 자본 효율 개선, 주주 환원 확대 등이 이어지면서 일본 증시가 과거와 다른 투자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다. 반면 한국은 AI 반도체 중심의 성장 기대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외국인 투자 비중은 줄어드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원화 약세와 높은 환율 변동성, 글로벌 자금 재배분 과정 등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복잡한 이슈부터 최신 트렌드까지. 지금 구독하시면, 매일 아침 <도쿄나우>가 일본의 오늘을 가장 빠르게 전해 드립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