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 빈 석유화학·배터리…'신용등급 줄강등' 된서리
주요 신용평가회사가 석유화학과 2차전지 기업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가 겹친 영향으로 ‘곳간’ 사정이 어려워진 점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반면 반도체와 전력기기 업종에선 등급이 오른 기업이 적지 않다. 업계에선 회사채 시장의 신용도 양극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저축은행도 등급 하향

곳간 빈 석유화학·배터리…'신용등급 줄강등' 된서리
나이스신용평가, 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등 국내 3대 신용평가사가 지난 4~6월 상반기 정기신용평가를 진행한 결과 롯데케미칼, LG화학, SK어드밴스드, 여천NCC, 에코프로 등 석유화학 기업과 2차전지 기업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고 1일 발표했다.

한국기업평가는 LG화학 등급을 AA+에서 AA로 내렸다. 여천NCC와 SK어드밴스드 등 재무 부담이 큰 A급 이하 석유화학 기업의 신용등급 하향 조정이 두드러졌다. 여천NCC 신용등급은 A-에서 BBB+로, SK어드밴스드는 BBB+에서 BBB로 조정했다. 중국 석유화학 기업의 대규모 증설에 따른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악화해 차입 부담이 커진 점이 등급 하향 배경으로 꼽힌다.

2차전지 업종도 된서리를 맞았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에코프로,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등의 신용등급을 A에서 A-로 한 단계씩 하향 조정했고 엘앤에프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렸다. 대규모 투자로 재무 부담이 커진 가운데 전기차 수요 부진으로 재무 안정성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저축은행과 부동산 신탁사 등급도 줄줄이 하향 조정됐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커진 게 원인이다. 나이스신용평가는 KB저축은행, NH저축은행, IBK저축은행 신용등급을 A에서 A-로 한 단계씩 내렸다. 나이스신용평가 기준으로 올해 신용등급 또는 등급 전망이 하향된 기업은 37곳으로, 상향된 기업 32곳보다 많다.

하향 기업 명단에는 중앙그룹 계열사가 대거 포함됐다. 중앙일보, JTBC, 메가박스중앙 등 중앙그룹 6개 계열사는 단기간에 신용등급이 투기 등급을 거쳐 디폴트(D) 등급까지 떨어졌다.

신용등급은 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때 시장에서 받는 가격의 핵심 지표다. 회사채, 기업 신용, 보험금 지급 능력 등을 종합해 최상위 등급인 AAA부터 AA, A, BBB 순으로 D등급까지 10단계로 나뉜다. 각 등급은 +와 -로 세분된다. 시장에서는 통상 A급 이하 채권을 비우량물로 분류하고, BB등급 이하는 투기 등급으로 인식한다.

◇방산, 조선 등은 신용도 개선

반도체와 전력기기, 방위산업, 조선 등 업황 개선세가 뚜렷한 업종은 신용도가 개선됐다. 메모리 반도체 업종에서는 SK하이닉스 신용등급이 AA에서 AA+로 한 단계 올랐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의 수혜를 보는 전력기기 업종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등급이 상향 조정됐다. 방산 업종에서도 현대로템과 풍산이 나란히 A+에서 AA-로 올라섰다. LG유플러스와 에쓰오일, 메리츠증권, 키움증권 등 업황과 재무 안정성이 양호한 우량 기업도 신용등급 상향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신용등급 하향 조정은 사실상 A급 이하 비우량 기업에 집중됐다. 등급이 내려간 기업의 95% 이상이 A급 이하로, 지난해 80% 수준보다 15%포인트가량 높아졌다. AA급 이상 우량 기업 중 등급이 하락한 곳은 LG화학이 유일했다. 송기종 나이스신용평가 평가정책본부장은 “예년에 비해 등급 상·하향 변동이 모두 많았다”며 “고금리와 업황 부진이 이어지면서 A급 이하 기업의 부도 위험이 커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우량·비우량 기업 간 신용도 차별화가 한층 더 심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고금리 환경이 지속되면 차입 의존도가 높고 현금 창출력이 약한 A급 이하 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신용도 저하와 금리 부담이 겹치면서 회사채 조달도 위축됐다. 올해 상반기 기업의 회사채 발행 규모는 67조3933억원으로 전년 동기 74조9574억원보다 10%가량 감소했다. A급 이하 기업은 장기물 발행보다 단기물 중심의 조달에 의존하고 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